간접 경험의 즐거움

부조리에 맞서는 돌팔매 같은 영화 '재심'

새 날 2017. 2. 1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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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전북 익산의 약촌 오거리,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을 지나던 청년 조현우(강하늘)는 급작스레 차도로 뛰어든 누군가를 피하려다 그만 넘어지고 만다. 그런데 때마침 주변에 세워져 있던 택시 안에서 무참히 살해된 택시기사가 발견되고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는 일이 벌어진다. 당시 오토바이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조현우는 영문도 모른 채 택시기사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어 끌려간다.


그가 용의자에서 살인범으로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은 일사천리다. 그렇게 10년의 옥살이를 하고 나온 그다. 조현우 가족의 삶은 이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풍비박산났다. 정부가 피해자에게 구조자금으로 선지원했던 수천만 원에 대해 이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하였는데, 가정 형편이 워낙 어렵다 보니 이를 갚지 못하면서 어느새 빚만 억대를 넘어선 것이다. 무료 변론 서비스를 위해 현장에 투입되었다가 이들의 딱한 처지를 우연히 접하게 된 변호사 이준영(정우)은 해당 사건의 실체에 다가설수록 무언가 의문투성이임을 깨닫고, 재심을 청구하기로 하는데...



이 작품은 지난 2000년 8월 10일 전라북도 익산 약촌 오거리에서 실제로 발생한 이른바 '약촌오거리 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덧입혀 제작됐다. 해당 사건은 얼마 전 한 공중파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전파를 타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다. 아울러 지난해 11월 16일,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16년만에 재심을 거쳐 마침내 무죄 판결이 성사된다. 


조현우가 살인 누명을 쓰게 된 건 전적으로 그가 힘이 없고 뒷배가 없는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백을 강요하며 완력을 행사한 백철기 형사(한재영)는 약자에겐 한없이 강하고 강자에겐 비굴할 정도로 약한, 그러한 류의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 조현우뿐 아니라 그처럼 어려운 환경에 처한 청년들에게 누명을 씌워 철창행으로 보내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으며, 반면 담당 검사 앞에서는 순하디 순한 양으로 변모하는 아주 치졸한 인물이 다름아닌 백철기였다. 더구나 그의 활동 영역은 대도시가 아닌 폐쇄성이 짙은 조그만 시골 마을이라 그가 지닌 권력을 불법적으로 휘둘러도 이를 견제할 만한 장치가 딱히 없다. 



조현우가 당한 억울함은 그로 하여금 법은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강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신념을 굳히게 한다. 그의 어머니(김해숙)는 눈이 멀어 갯벌에서의 물질도 어려운 처지에 오로지 자식을 위해, 그리고 빚더미에 앉은 그들의 어려운 형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힘든 물질을 계속해야 했고, 조현우는 억울한 옥살이 10년도 모자라 살인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해야 했다. 



하지만 무료 변론을 위해 나선 변호사도 그렇거니와 멀쩡한 로펌에서 근무하는 변호사 할 것 없이 누구 하나 그가 겪은 억울함에 대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오로지 개인의 영달 그리고 돈만을 추구하는 세상이다. 이준영은 돈을 좇다 빚에 쪼들리면서 벼랑 끝에 서게 된 별 볼일 없는 변호사였다. 덕분에 그의 아내와도 사이가 멀어져 가정마저 깨질 위기다. 어느날 그의 친구이자 번듯한 로펌에서 근무하던 변호사 모창환(이동휘)의 알선으로 그는 같은 로펌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처음엔 속물에 지나지 않아 보였던 이준영, 반대로 적어도 이준영보다는 직업적 사명의식이 훨씬 투철해 보였던 모창환,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두 사람은 서로 대립각을 세우며 상반된 방향으로 변모해간다. 이 변화 과정은 영화의 핵심 관람 포인트이자 주요 축을 이룬다. 로펌 대표(이경영)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울러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는 얄팍한 계산에 의해 맡게 된 조현우 사건, 하지만 조현우와 직접 대면하고 사건의 실체에 다가설수록 이래선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꾸준히 이준영의 마음과 머릿속을 뒤흔들더니 결국 재심이라는 힘겨운 카드를 꺼내들게 된다. 



그는 흡사 영화 '변호인'에서의 송변을 빼닮았다. 그러니까 애초 정의감 따위와는 일면식도 없던 그들이지만, 상식을 비껴간, 말도 되지 않는 현실 세계를 접하면서 불의를 향한 저항에 점차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준영의 색채가 변화해갈 즈음 그의 친구 모창환의 이미지도 점차 다른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이번 작품의 주요 변곡점이다. 강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과 약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의 치열한 자기 싸움이 시작된 셈이다. 재심에서의 이준영의 변론은 사이가 멀어졌던 아내의 표정마저 확 바꿀 만큼 멋진 것이었다.



실화인 데다가 모두가 결말을 빤히 아는 내용이라 영화적인 재미가 상대적으로 덜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싹 걷어내도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이를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흡인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익살스럽거나 때로는 안타까움에 눈물을 훔치는 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오가는 정우의 연기는 시종일관 흠 잡을 데 없었으며, 대사가 많지 않아 오히려 더욱 곤혹스러웠을 것 같은 강하늘의 내면 연기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억울했을 약촌 오거리 사건의 실재 인물로 고스란히 빙의한 느낌이다. 김해숙과 이경영 등 중견연기자들의 선 굵은 연기가 이에 더해지니 실화의 묵직함이 한껏 살아난다. 



이 영화에서 다룬 특정 사건처럼 세상 한켠에는 힘없는 약자를 괴롭히고 심지어 인권마저 앗아가는 불의한 세력이 존재한다. 더구나 만인에 평등해야 할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외려 가진 자들만을 보호하는 형태로 변질되기 일쑤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엄혹하다. 때문에 이 작품이 이러한 세상과 현실에 당당히 맞서고 부조리를 향해 던지는 작은 돌팔매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감독  김태윤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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