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세월호 1000일, 광장의 다양성과 마주하다

새 날 2017. 1. 1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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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볼일을 마친 난 전철을 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오후 5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런데 선릉역 방향의 큰길은 왠지 어수선했다. 아니나 다를까. 저 아래쪽에서 태극기를 든 일군의 사람들이 내가 있던 방향으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아마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무리였던 듯싶다. 그러니까 난 본의 아니게 이들 집회 참가자들의 행진을 가로질러 지나가야 할 판국이다. 이들의 연령대는 대체로 장년 이상의 어르신들로 가늠된다. 물론 그 이하의 연령대에 속하는 이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시위대를 이끄는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차량이 점점 가까워져옴에 따라 노랫소리가 제법 또렷하게 들린다. 놀랍게도 군가였다. 그러고 보니 이들의 행동엔 어느 정도의 일관성이 엿보인다. 양손엔 태극기와 자신들의 주장이 담긴 피켓이 들려 있었고, 차량에서는 군가가 연신 울려퍼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헤럴드경제


일단 애국이란 개념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는 주장을 이를 통해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이면엔 왠지 보다 치밀한 전략이 감춰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즉, 그들과 반대 진영에 위치한 촛불에 '불순' 프레임을 씌우고, 심지어 민심이 아니라는 박근혜 대통령 변호인단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양식으로 읽힌다.


현장의 모습을 조용히 스캔하던 난 이를 이미지로 남기고 싶었으나 거칠고 어딘가 강퍅해 보이기까지 한 이들의 행동 때문에 왠지 사진을 찍으면 봉변을 당할 것 같아 차마 휴대폰을 꺼내들 수가 없었다. 집회 진행 요원이 참가자들에게 차도로 행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무시한 채 인도 위로 올라와 거리 전체를 휩쓸면서 다녔다. 



그토록 애국을 부르짖던 어르신들이었건만, 아이러니하게도 질서 유지가 되레 어려워 보였다. 이러한 모순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행진 인파 속을 반대로 헤집고 가야 했던 난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평소엔 코앞이라 여겼던 선릉역에 이르는 거리가 이렇게도 멀 수 있다니, 복잡한 심경이 교차하던 찰나다.


얼마 후 어렵사리 행진 인파 속을 뚫은 난 선릉역에 도착, 무사히 전철에 오를 수 있었다. 목적지인 경복궁역까지 가는 전철 안에는 태극기를 들거나 탄핵 반대의 글귀가 쓰인 종이 피켓을 든 어르신들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띈다. 이윽고 세월호 1000일 집회가 열리고 있는 광화문광장에 도착했다. 해가 이미 넘어간 터라 곳곳에선 촛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메인 무대에서는 본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생존한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와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이날 행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인 생존 학생과 유가족의 포옹 모습이 연출됐다. 순간 광장 일대는 적막감에 휩싸인다.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월호 1000일을 이틀 앞둔 시점에서 광장에 모여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고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외쳤던 사람들의 연령대는 어린 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아주 다양했다. 온 가족이 함께 나오거나 연인들끼리 손을 잡고 나온 경우, 그리고 친구들 혹은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도 간혹 눈에 띈다. 이들의 손에는 촛불이 들려져 있었고, 구호를 외치거나 슬픈 영상이 흐를 때를 제외하고선 한결 같이 온화한 표정이었다. 이날 광장엔 이렇듯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한 심성을 지닌 이들이 다수를 이뤘다. 


민주주의란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이란 가치를 존중하며, 그를 자양분 삼아 성장해 나가는 체계이다. 따라서 광장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지금처럼 여러 의견과 주장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건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광장에 나와 주장하는 모든 이들의 의견을 난 존중한다. 다만, 이른바 4%(박근혜 대통령 최근 지지율)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그에 따르는 행동은 무언가 부자연스럽기 짝이없다. 더구나 미래 세대에게 귀감이 되어야 할 연령대에 속하는 분들의 행동 치고는 전혀 그렇지 못한 모습 일색이라 안타깝다. 



이들이 현재 벌이고 있는 건 일종의 애국자 코스프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갖춰야 할 진정한 애국자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 적어도 군가를 부르거나 태극기를 흔드는 형태 따위는 분명히 아닌 것 같다. 20세기에 여전히 갇혀 있기라도 한 양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며 이를 미래세대에게까지 전가시키려는 목적이 과연 진정한 애국일까? 지금보다 공정하고 상식적인 사회를 물려줄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조용히 지원해야 하는 어르신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세월호의 진실을 외면하고, 아니 되레 방해하고, 돈이 사람보다 귀한 가치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범죄 집단을 옹호하는 건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의 자유 영역이 아닌 단순히 인간 됨됨이에 관한 사안이다. 범죄 세력을 옹호하면서 태극기를 흔들거나 애국을 주장하는, 무언가 엇박자스러우면서도 괴기스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른 무엇보다 측은지심이 앞서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상식적이며 정상적인 사회로 가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바로 9일로 1000일째를 맞이한 세월호의 진실 인양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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