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노력과 능력 신봉의 함정, 기울어진 운동장

새 날 2016. 8. 10.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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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되어 가는 올림픽의 열기가 흡사 현재 한반도를 달구고 있는 찜통 더위만큼이나 점차 뜨거워지고 있다. 우리가 올림픽 등 스포츠에 빠진 채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과 함께 동화되어 그들로부터 뜨거운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건 오로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다름아닌 선수라면 누구에게나 똑같은 조건의 공정한 룰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것이 깨진다면 그 경기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과 진배없어 우리에게 아무런 감흥조차 주지 못 한다. 이를테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하거나 기타 반칙 행위를 일삼은 경우가 그에 해당하겠다.


우리가 사는 사회라고 하여 다를까? 최근 '지균충', '기균충' 이라는 신조어를 접하게 됐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을 비하하거나 혐오하기 위한 요량으로 단어 말미에 벌레 '충'자를 붙이는 경우가 횡행해 오곤 했는데, 그의 일환이란 건 대충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을 알고 보니 다소 충격적이다. 그러니까 이는 서울대학교 '지역 및 기회균형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같은 학생들이면서도 상대방을 공공연하게 벌레로 취급하고 있는 이 뜨악한 현실은 씁쓸함을 넘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노컷뉴스


해당 전형은 농어촌 지역 고교나 저소득가구, 북한이탈가정 등 이른바 사회 소외계층을 배려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이는 비단 서울대학교에만 있는 제도도, 아울러 학교 단위에만 있는 제도도 아닌, 사회 요소요소에서 공히 운용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아울러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서울대학교는 자타가 인정하는 국내 최고의 대학이다. 따라서 재학생들의 자부심은 여타 학교의 그것보다 월등하리라 짐작된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지역 및 기회균형전형을 통해 상대적으로 낮은 성적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흡족하게 다가올 리 만무하다.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들더러 '지균충'이라는 끔찍한 용어를 사용해 가며 비하하는 놀이마저 횡행하고 있단다. 이들을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계급으로 분류, 아예 배제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이러한 움직임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물론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한국일보가 보도한 김경근 고려대 교수의 ‘중고등학생의 능력주의 태도 영향 요인에 대한 구조방정식 모형 분석’에 따르면, 환경보다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 성공을 결정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근래 강해진 것으로 드러났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능력주의가 공고한 신념체계로 자리를 잡은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여졌다.



능력 차이에 의해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굉장히 객관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현격하게 그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의 능력이, 과연 스포츠 세계에서 이뤄지는 룰처럼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울대 등 유명 대학 합격자의 다수를 특목고나 자사고 등이 싹쓸이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를 더욱 세분화해 볼 경우, 같은 서울에서조차 강남 출신이 여타의 출신을 압도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월평균 소득 700만원 이상과 100만원 미만 가구의 사교육비 차이가 무려 7배에 달한다. 사교육의 차이가 교육 불평등을 낳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볼 때 이는 다시 앞서 언급한 입시 결과를 야기하는 악순환의 주범이라 할 만하다. 이미 공고해질 대로 공고해진 경제력의 차이가 상급학교 입시는 물론 향후 사회 진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의 성공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인자가 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일보


애초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내지 출발선상이 전혀 다른 상황에서의 경쟁이건만, 기득권을 쥔 자들로부터는 조금의 아량이나 배려조차 없는 삭막하기 짝이없는 건조한 면모가 엿보인다. 더욱 우려스러운 건 불공정과 불균등한 환경이 가속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들을 더욱 유리하게 만드는 능력 신봉의 사회 형태가 갈수록 굳어져 간다는 사실이다.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듯 능력을 지닌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 능력을 지니게 된 배경이나 환경이 지금처럼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의 형태라면 얘기는 전혀 달라져야 한다. 그나마 불공정한 룰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아주 작은 기회나마 제공하고 있는 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가는 사회적 현상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함일 테다.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사다리가 자꾸만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이러한 숨구멍조차 없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떠한 형상을 띠게 될까?


최근 불거진 이화여대 사태에 대해 사회 각계각층에서 칭찬 일색의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낸 부분에 대해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대생들의 '지균충' 유행이나 이화여대의 '사회 배려 계층을 위한 단과대 개설 반대' 움직임 속에는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전혀 없지 않다. 능력 있는 사람이 대접 받아야 한다는 공통된 그들 주장의 이면에는 사실상 기득권을 쥔 자들의 팍팍한 마음 씀씀이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서 능력주의의 신봉은 자칫 재앙을 낳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지금처럼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완전히 걷어차 버린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 남는 건 결국 더욱 커져가는 위화감과 갈등, 혐오 그리고 증오뿐이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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