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이 엄동설한에 오죽하면 거리로 나섰겠는가

새 날 2016. 1. 1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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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19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이렇게 계속 국민들이 국회로부터 외면을 당한다면 지금처럼 국민들이 직접 나설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을 지켜봐야하는 저 역시 너무도 안타깝고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18일 박 대통령은 경기 성남시 판교역 광장에 마련된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1천만 서명운동본부 부스를 직접 찾아가 서명까지 했다. 이른바 서명 정치를 통해 입법부에 대한 압박을 이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정치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며 국회에 대한 압박을 가해 와 논란이 됐던 사례가 비단 이번 사안만이 아니지만, 이쯤되면 점입가경이라 할 만하다. 박 대통령 스스로는 아마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한 것이라 말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일개인이기 이전에 공인이라는 사실을 애써 망각한 듯한 대통령의 처신엔 심각한 결함과 오만스런 태도마저 엿보인다.

 

ⓒ프레시안

 

하긴 대통령에게 있어 국민이란, 마치 귀에 걸거나 코에 걸 때마다 그 개념이 달라지듯 우리가 익히 알던 국민이란 의미와는 그 거리가 꽤나 멀긴 하지만 말이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은 그동안 신년기자회견이나 국무회의 등의 자리를 빌려 사실상 야당을 강하게 압박해 왔다. 이젠 이도 모자라 서명 정치에까지 직접 뛰어든 셈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모르겠다. 이를 제지할 만한 힘과 세력이 부재한 탓에 대통령의 권한 밖 행세는 오늘도 거의 무주공산 수준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서명운동과 관련하여 "오죽하면 이 엄동설한에 경제인과 국민이 거리로 나섰겠는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경제와 일자리의 위기가 몰려올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절박하게 느끼는 분들이 현장에 있는 경제인과 청년"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을 듣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을 맴돈다. 오늘 서울 아침기온은 영하 15도를 찍으며, 체감기온마저 20도 아래 저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바람은 더욱 매서웠다. 칼바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30일부터 소녀상 곁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 온 우리 국민들의 근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18일 밤 대통령이 언급하던 국민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또 한 무리의 국민들이 여지없이 소녀상 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들이 추울까 봐 몇몇 시민들이 사용하라고 간이텐트를 가져왔지만, 주어 없는 누군가처럼 야멸찬 경찰에 의해 반입이 막히고 말았단다. 결국 또 다른 시민이 자동차를 덮을 때 사용하던 비닐을 가져다 주어 소녀상 지킴이들은 그나마 이를 뒤집어 쓴 채 18일 그 춥디 추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는 전언이다.

 

때마침 아베가 소녀상 이전과 10억엔 연계를 사실상 시인했다는 언론보도가 잇따랐다. 소녀상 이전이 10억엔 지급의 전제 조건이라며 명확히 밝힌 것은 아니지만, 아베 총리가 한일 정상 간의 신뢰 관계까지 들먹이고 나선 건 사실상 이를 연계시킨 것이라고 봐야 함이 맞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정부는 이를 극구 부인하고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위안부 협상 타결 당시 정부가 소녀상 이전 가능성을 내비쳤다는 사실과 이후 일부 보수단체들이 벌여온 망동 그리고 정대협 등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 및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나선 시민들을 향한 경찰의 이해할 수 없는 대응은 소녀상의 이전 내지 철거가 사실상 시간 문제일 뿐, 조만간 현실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게 하기에 충분하다.

 

ⓒ한겨레

 

대통령에게 있어 국민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입으로는 민생과 청년 등을 읊고 있지만, 사실상 경제인과 기업이 전부 아니었던가? 노동자에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며, 아울러 민족혼을 지키려는 애국시민들에겐 체증과 폭압을 행사하고 있고, 오롯이 기업과 재벌의 비호에만 나선 대통령 아니던가. 아울러 이 엄동설한에 경제인들이 나서 자신들을 위해 서명 받는 일에 대해선 너무도 안쓰러워 하면서도 정작 우리 민족의 아픈 과거가 고스란히 담긴 소녀상을 지키는 애국애족 시민들에 대해선 전혀 안중에도 없지 않은가. 이렇듯 몰상식한 일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우린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 북극 추위에 텐트조차 설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인가. 그대들이 정녕 대한민국의 경찰이고 대한민국의 지도자 맞는가?

 

이 엄동설한에 오죽하면 국민들이 거리로 나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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