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폐지 줍는 할머니를 도우며 문득 든 생각

새 날 2015. 11. 18.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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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조량이 점점 줄고 있다. 눈에 확연히 띌 정도로 말이다. 시간은 어느덧 가을 끝 언저리에 놓여 있지만, 왠지 겨울에게 선뜻 자리를 물려주기가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 기온은 여전히 따뜻하니 말이다. 요맘때면 벌써 영하로 떨어졌을 법한데 아침 기온조차 10도를 웃도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개인적으로 춥지 않아 좋긴 하다. 그러나 이렇듯 가을과 겨울의 경계 어디쯤엔가 닿아 있을 때면 늘 피부에 와닿던 스산함이 절정을 찍는 느낌이다. 더구나 비마저 잦다. 왠지 우울해진다.

 

창피한 얘기이지만, 며칠전 집 계단에서 발을 헛딛는 바람에 그대로 공중부양한 일이 있었다. 감을 따다 벌어진 일이다. 덕분에 몸뚱아리 곳곳엔 온통 상처 투성이다. 양쪽 무릎과 팔꿈치엔 타박상으로 보이는 멍이 생겼고, 손목 부근엔 심한 찰과상마저 입었다. 머리에도 충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입을 벌릴 때마다 통증이 밀려온다. 어디선가 주워 들은 얘기인데, 몸의 염증 수치가 높을수록 우울감도 커진단다. 그 때문일까? 가뜩이나 스산하고 음울한 기운이 가득한 요즘 날씨에, 몸마저 이 모양이니 더욱 우울해지는 느낌이다.

 

ⓒ경향신문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는다. 그때다. 조그마한 키에 등마저 굽은 나이 지긋해 보이는 한 할머니께서 뭐라고 혼자 말씀을 하신다. 그제서야 나의 시선이 그곳에 닿는다. 할머니 곁엔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가 도로 한켠에 세워져 있다. 주변에 고물상이 있는 까닭에 폐지 줍는 노인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어 평상시와 같이 별 대수롭지 않게 지나던 와중이다. 핑계 같지만, 때문에 할머니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 순간까지도 나의 눈엔 주변의 풍경이 그다지 특별하게 와닿지 않았다.

 

"여기 언덕 올라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데, 이것 좀 도와주면 안돼?"

 

약간의 언덕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폐지가 한가득 실린 리어카를 할머니 혼자 밀고 가기엔 무척 버거웠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말씀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난 선뜻 그러마 하고 할머니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였다. 리어카의 손잡이 부분을 움켜 쥔 채 힘껏 밀었다. 그런데 낭패다. 잘 안 움직인다. 생각했던 수준보다 폐지의 무게가 상당했다. 잔뜩 힘을 준 채 힘겹게 밀었더니 그제서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몇 발자욱 떼는 일조차 이리도 힘겨운 데다, 평소 도로의 차선 하나를 차지하고 위태롭게 움직였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한없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내가 리어카를 밀고 수십미터를 올라가는 동안 자동차들은 나를 피해 옆 차선으로 바꿔 탔다가 이내 내 앞으로 끼어 들곤 한다. 이러한 순간이 운전자들에게는 단순히 인내심을 요하는 상황으로 다가올지 모를 일이지만, 폐지를 줍는 분들에게는 어쩌면 생명과도 직결된 아찔한 순간의 연속일 테다. 힘겹게 밀어 올리던 리어카가 드디어 고물상 입구에 도착했다. 마음 같아선 고물상 안쪽 끝까지 리어카를 옮겨 드리고 싶었으나 먼저 와 계신 분이 입구에 서서 대기 중인 터라 어쩔 수 없이 그 뒤에 리어카를 세우고 한참 뒤에서 걸어 오는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할머니, 앞에 먼저 오신 분이 계셔서 그 뒤에 리어카를 세워 두었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이구 정말 고맙네 고마워, 잘 가"

 

고마와서 몸둘 바를 몰라하시는 꼬부랑 할머니를 보니, 왠지 어릴적 할머니 하면 쉽게 그려지던 그러한 전형적인 할머니상이 떠오른다. 그런데 할머니가 처음 말을 걸어올 때에도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지던 건데, 할머니의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연신 풍겨져 오고 있었다. 물론 이 냄새의 정체를 알 것도 같다. 가끔 서울 도심에 위치한 지하철역 구내를 지날 때면 맡을 수 있던 그러한 냄새다. 할머니가 오랜 시간을 씻을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모양이다. 하긴 하루종일 동네 곳곳에 버려진 폐지를 줍는 일에 몰두하느라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있을 리가 만무할 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런 저런 생각들이 겹치니 갑자기 코끝이 찡해 온다. 이 할머니도 누군가의 할머니일 테고, 또한 누군가의 어머니이기도 할 텐데, 어쩌다 이런 험한 일로 여생을 바쳐야 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잘 알다시피 폐지의 단가는 갈수록 떨어지는 추세다. 이렇게 하루종일 모아 리어카 한가득 폐지를 실어 날라도 손에 쥐어지는 돈은 고작 몇 천원이 전부다. 이런 식으로 한 달 내내 일해 봐야 돈 10만원도 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차도에서 차선을 넘나드는 곡예 이동으로 목숨까지 위태로울 지경이니 이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 어디 있겠는가.

 

ⓒ제주일보

 

곧 겨울이다. 교통사고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추위라는 복병과도 싸워야 하는 이분들에겐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가 아닐 수 없다. 운전하시는 분들이라면 평소 폐지 줍는 어르신들이 차선을 넘나든다는 이유로 운전에 방해 된다며 투덜거리거나 위협 운전을 일삼기 보다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해 보면 어떨까? 아울러 거리에서 힘겹게 폐지를 실어 나르고 계신 어르신들을 만나게 될 경우, 냄새 난다거나 더럽다며 회피하기 보다 뒤에서 가볍게 한 번씩 밀어드리는 건 어떨까?

 

신기한 일인데, 우울감이 절정을 찍던 나의 마음은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드린 뒤로 많이 완화된 느낌이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 우울한가? 그럼 거리로 나가보자. 길 위에서, 혹은 도로 위에서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계시는 어르신들을 가볍게 도와드려 보자. 우울감이 씻겨져 내려가는 묘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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