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헬조선이 역사교과서 때문이라는 발언에 대해

새 날 2015. 10. 28.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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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국정화에 대한 의지는 예상했던 수준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단호했다. 27일 있었던 국회 시정 연설에서 박 대통령은 작금의 역사가 잘못돼 있으며 이를 바로 잡아야 하는 건 당연한 과제이자 우리 세대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역사를 바로잡는 건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야권과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국정화 반대 움직임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제아무리 반대 여론이 봇물을 이룬다 해도 아랑곳없이 갈 길을 가겠노라는 거다. 이 말인즉슨 주변에서 국정화는 결코 옳은 해법이 아니라며 끊임없이 외쳐대고 조언을 해도 작금의 상황에선 쇠귀에 경읽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이미 예견됐던 시나리오다. 비단 청와대 5자 회동에서 선보였던 대통령의 절벽과도 같았던 소통 행보 때문만은 아니다. 국정화 논란은 어느덧 교육부가 비공개로 전담 조직을 꾸려 운영해 왔다는 비밀TF까지 드러나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아울러 정부는 국정화 전환 발표 다음날인 13일 행정예고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국무회의를 통해 국정 교과서 편찬 개발 관련 예산 44억원 전액을 예비비의 형태로 책정한 바 있다. 전담 TF 운영이나 사전 예산 책정 등의 행위는 국정화 시행을 염두에 두지 않고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행정예고 따위는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헤럴드경제

 

더구나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단순히 장관의 고시만으로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교과서 발행체제 전환 절차는 정부와 여당의 폭주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자 국정화로 향하는 길에 주단을 깔아주고 있는 격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국정화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와닿게 하는 건 정작 따로 있다. 새누리당의 국정화를 향한 지원사격은 그야말로 눈물겨울 정도다. 특히 김무성 대표의 연일 계속되는 국정화 관련 발언은 어느덧 놀라움을 넘어 안쓰러움까지 불러온다. 이러한 엉뚱한 발언들이야 말로 진정 국정화의 시대를 알리는 시금석으로 여겨지는 탓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헬조선의 유행과 기업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는 이유를 현재의 역사 교과서로 몰아붙이는 무모함을 드러냈다. 그렇다. 이 발언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무리수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김 대표는 26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현 역사교과서가 청소년에게 패배의식을 가르치고 있다. 개발도상국이 한국의 성장과 발전을 부러워하는데, 한국에선 ‘헬조선’이나 ‘망할 대한민국’이란 단어가 군림하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교육 현장에선 과거회귀적, 폐쇄적, 국수주의적인 사고체계를 가르치고 있다. 이 때문에 취업 과정에서 기업을 노동자 착취 대상으로 여기게 되고 젊은이와 기업 모두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고도 했다.

 

이쯤되면 심각한 병이 아닐까 싶다. 국정화의 당위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무리수를 동원해서라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신공을 펼쳐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여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발언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수준이다. 때문에 이 대목에서 난 김 대표가 한 발언이 자신의 생각이라기보다 차라리 정치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별한 노림수가 담긴 단순 수사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의 교과서를 검인정하여 내놓으면서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 인식 형성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힌 건 다름아닌 현 정부 하의 교육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 대표의 발언은 결국 자기부정이자 철저히 자기모순에 빠져든 셈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아울러 어떻게 역사 교과서 하나로 인해 청소년들이 패배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 경쟁력까지 잃고 있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걸까. 이게 과연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와 관련하여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남긴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유시민 전 장관은 지난 21일 모교인 대구 심인고 소강당에서 후배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특강을 통해 “우리도 국정교과서로 배웠지만 국정교과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유신체제를 ‘한국 신 민주주의체제’라고 가르쳤지만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나면 쉬는시간에 ‘이것은 독재야’라고 얘기하면서 자랐다. 결국 국정화는 의미없는 일,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유시민 전 장관의 발언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입장이다. 비슷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즘 청소년들은 유 전 장관이나 나 때보다 훨씬 순진하기라도 하다는 의미인가? 아울러 작금의 역사 교과서 내용이 진짜로 문제 투성이라고 전제한다면 요즘 청소년들이 이러한 교과서 내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탓에 헬조선을 외치며 패배주의에 빠졌다는 말인가? 단순히 교과서 하나 때문에? 이 정도의 사고 방식이라면 김 대표는 이른바 '만물 역사교과서설'을 신봉하며 이에 심취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상황이다.

 

김 대표는 헬조선의 현상이 무얼 의미하며, 왜 발생하고 있는지를 정말 몰라서 이런 발언을 한 걸까? 그렇다면 더욱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집권여당의 대표라는 작자가 청년세대들의 어려움에 대한 자기비하적 표현 현상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어느덧 집권 8년차에 접어든 새누리당이거늘 젊은이들이 헬조선을 외치며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없다는 의미인가? 이는 결국 자신들의 책무를 회피하기 위해 역사교과서를 끄집어들인 셈? 역사교과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국정 운영 실패의 책임마저 그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고 있는 건지 이 정도면 후안무치가 따로 없는 셈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 난무하는 걸로 봐선 김무성 대표는 분명 자신의 생각 그대로를 표현한 게 아닐 것이라 짐작된다. 최근 공천권을 놓고 당청 및 계파간 갈등을 빚고 있던 상황의 출구 전략으로 이 만한 게 없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미래 정국의 향배를 고려한, 대통령의 의중에 부합하려는 정치적 셈법이 반영된 발언에 가까워 보이는 탓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자체로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역사에 애시당초 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이 과거의 사실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또한 이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기술 내용은 전혀 달라질 수 있는 성향의 것인 까닭이다.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김무성 대표의 역사교과서에 대한 시각이 스스로의 발언 그대로라고 한 번 가정해 보자. 그러니까 헬조선이 역사교과서 탓이라는 주장 말이다. 마침내 국정화가 단행되고, 헬조선 현상이 역사교과서 때문이라는, 아무리 봐도 영 삐딱하기만 한 김 대표의 시각이 그대로 투영되고 그의 사고와 부합하는 새 교과서가 차후 등장하게 된다면? 그 교과서의 내용은 과연 어떨까? 이는 우리 사회에 재앙으로 다가올 게 틀림없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때문에 난 김무성 대표의 역사교과서 관련 발언이 지극히 정치적인 수사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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