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아내가 베푼 뜻밖의 배려

새 날 2015. 10. 2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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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수년 동안 애지중지 길러오던 머리카락을 최근 잘랐다. 과감하다는 표현이 걸맞을 만큼 짧디 짧은 스타일로 변모한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머리카락을 길러왔던 이유가 참으로 특이하다 못해 유별나다. 내게 가발을 만들어주기 위함이란다. 이게 무슨 말일까? 그러니까 나이를 먹어가며 자연스레 머리숱이 적어지고 예전과 달리 검고 짙었던 나의 머리 곳곳이 휑해지다 보니 가까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요량이라는 것이다. 물론 꿈보다 해몽이란 사실임을 난 잘 안다. 

 

하지만 마치 변덕장이이기라도 한 양 심경의 변화가 생기거나 무언가 작은 기회만 닿았다 하면 머리 손질에 나서는 여성들이 즐비하거늘, 그깟 숏커트 한 번 한 게 뭐가 그리 대수냐고? 물론 지극히 맞는 말이기에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다. 아내도 이번에 머리를 다듬기 전인 수년 전까지만 해도 여느 여성들처럼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오늘은 머리나 해야겠다"며 스타일을 자주 바꿔오곤 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너무도 오랜 기간 손을 대지 않았던 영향이 크겠지만 이번에 아내가 바꾼 헤어 스타일은 평소의 손질과는 달리 무언가 생경한 느낌이다. 난 그게 과연 무얼까 한참을 생각해 본다. 실은 생각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도무지 형체를 종잡을 수 없는 느낌과 감정 따위가 그보다 훨씬 앞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말과 글로는 형용하기 힘든, 무언가 아득한 느낌이라면 이해할 수 있으려나? 짧게 자른 머리카락, 그로 인해 드러난 유난히 흰 목덜미, 물론 이 또한 그 탓이겠지만 전반적으로 껑충해 보이는 외모, 미소년...?

 

그랬다. 이제 그 아득하던 느낌의 정체가 조금씩 형체를 드러내던 찰나다. 돌이켜 보니 아내를 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의 이미지는 영락없는 미소년의 그것이었다. 덕분에 지금은 잊혀졌던 까마득한 옛 감정들이 그와 함께 아스라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머리 모양이 과거와 비슷해졌다고 하여 20대의 한창 때 물오르던 외모와 견줄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다. 아내 스스로도 머리가 짧다보니 얼굴의 크기가 더 작아 보이는 데다 그 때문에 주름이며 과거엔 없던 움푹 패인 자리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며 연신 하소연이다. 최강 동안이라며 스스로를 위안 삼아 오던 패기는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이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밴 자신의 얼굴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기 바쁘다.



하지만 내겐 그녀의 이러한 투정조차 귀엽기만 하다. 나이 들어가며 자연스레 변모해가는 얼굴이야 오는 세월 막을 수 없듯 사실 무슨 수로 막겠는가. 광대뼈 주변이 예전보다 더욱 패이거나 팔자 주름이 잡히고 또 눈 주위에도 자글자글한 주름 투성이가 된다 해도 난 미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와 연애시절 그 풋풋했던 감정을 되살리게 해준 그녀의 변모가 한없이 반갑기만 하다. 

 

아내는 머리카락을 거의 자신의 허리께에 닿을 정도까지 길게 길러오면서 머리숱이 점차 휑해져가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거 길러서 당신이 나중에 쓸 가발 만들어줄게" 물론 앞서도 언급했듯 난 그녀의 발언이 농담이란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는 그 어떤 표현보다 따뜻하다. 지극히 사소한 데다 단순히 스쳐가는 농담에 불과할지라도 언제나 나를 향한 마음 하나 만큼은 한결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의 이러한 배려 깊은 바람은 안타깝게도 무위에 그치고 만다. 그녀의 머리를 다듬던 미용실에서 말하기를 머리카락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아 혹여 진짜 가발을 만들 요량이었다 해도 현실로 옮기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단다. 그래도 난 아내의 곱디 고운 마음 씀씀이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어느덧 아득한 과거로 남게 돼버린 우리의 연애시절, 그 당시 느꼈던 미소년의 이미지로 되돌아온 아내, 비록 흰 눈을 맞은 듯 머리 꼭대기엔 하얗거나 유난히 빛이 나는 훈장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얼굴 피부는 예전만큼 팽팽하지 않은 탓에 그동안 이겨온 세월과 중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오지만, 내겐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다가오는 데다, 과거의 감흥을 다시금 느끼며 이렇듯 함께, 그리고 곱게 늙어가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행복감으로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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