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리퍼트 대사를 향한 과잉 친절이 불편한 이유

새 날 2015. 3. 8. 18:12
반응형

주말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밖은 아직 깜깜했는데요.  여행을 위해 관광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버스에선 위성방송을 송출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웬만하면 TV를 잘 시청하지 않는 편입니다만, 특히 흔들리는 차량 따위에선 더더욱 그러한 편입니다, 이날 따라 앞자리에 앉은 탓에 제 눈길은 절로 TV를 향하게 되었답니다.  흘러나오는 방송에 어쩔 수 없이 눈길이 떡하니 꽂혔는데요. 

 

TV는 뉴스 채널에 고정돼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지난 주 벌어졌던 리퍼트 미 대사 피습 사건이 주요 이슈로 다뤄지고 있었는데요.  그 중 가장 눈에 띠었던 대목은 리퍼트 대사의 회복을 기원하고 나선 일반인들의 응원 메시지였습니다. 


다양한 계층에서 리퍼트의 쾌유를 빌고 있었습니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같이 가요 리퍼트" 내지 "세준 아빠 힘내세요"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극단의 폭력행위를 수단으로 삼았던 한 극단주의자에 의해 빚어진,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에 가해진 피습으로 인해 자칫 한미 동맹에 균열마저 우려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불식시키고 잠재우기 위한 나름의 눈물 나는 노력으로 비치고 있었습니다. 

 

ⓒ노컷뉴스

 

물론 이조차도 다소 지나치다라는 느낌은 없지 않았습니다만, 그만큼 이번 사안이 엄중하게 와닿는 터라 약간의 과잉이라 해도 이는 심정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러한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나 커뮤니티 등의 글에 따르면 TV를 통해 제가 전해들은 내용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리퍼트의 쾌유를 비는 발레, 부채춤, 난타 등의 공연과 한미 동맹 강화를 요구하는 집회, 성명 발표가 잇따랐던 겁니다.  각종 종교단체로부터 어버이연합, 고엽제전우회, 엄마부대 등 평소 보수라 자칭해오던 단체들은 빠짐없이 이에 동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언론은 아예 작정한 채 미국과 리퍼트 대사 띄우기에 나선 모양새입니다.  리퍼트를 '슈퍼스타'에 비유하거나 한미 양국의 '혈맹 아이콘'이라는 다소 낯 간지러운 표현도 서슴지 않고 있었습니다.  리퍼트 대사가 미국 젊은이 특유의 긍정 마인드로 초유의 사태에 잘 대처하여 한미 관계의 고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미국의 평가를 차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한국인들이 리퍼트의 의연한 대처에 감동 받아 눈물을 흘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일화를 통해 이번 사태를 감동 스토리로 승화시키려는 속내마저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사건 초기 중동을 방문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리퍼트 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위로와 쾌유의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고, 이완구 총리 역시 리퍼트가 입원한 병원을 직접 찾아 위로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그밖에 여야 대표도 지난 8일 리퍼트 병문안에 나섰습니다.  정부는 한미 간 고위급 외교 채널을 풀 가동하며 사건의 조기 진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미국의 진짜 속내를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거나 표면적으로는 이번 사건이 한미 동맹에 그 어떠한 악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보도된 바 있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로선 충분히 노력한 셈 아닐까 싶습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정부와 정치권이 그 어느 때보다 발빠르게 대처하고 나선 상황에서 왜 민간인(?)들마저 이렇듯 조직적으로 과잉 행동에 나선 걸까요?  아무래도 최근 동북아를 둘러싼 채 벌어지고 있는 한미 현안에 있어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더욱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일 테고, 때문에 미국에 상당한 부채의식을 지닐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리게 됐다는 이유가 한 몫 단단히 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물론 이는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뉴시스

 

어쨌거나 지극히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친절도 일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집회를 개최한 각종 단체의 성격상 그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지닌, 다분히 조직적이며 의도적인 행위로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칭 보수라 일컫는 단체들의 면면을 보노라면 지난 세월호 참사 등 그동안 각종 이슈가 있을 때마다, 비단 정치적 이슈가 아님에도 정치 이슈화 할 목적으로, 정부나 집권세력 등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성격이 짙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움직임은 지난 2007년 한국계 조승희 씨가 버지니아공대에서 총기난사로 38명을 살해했을 당시 당사자인 미국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아 했으나 한국계라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미국에 미안해 하거나 대통령의 미국 방문 사과까지 고려하는 등의 과잉 반응을 보였던 사례를 떠오르게 합니다. 

 

ⓒ뉴시스

 

이쯤되면 극단주의적 성향을 지닌 한 사람의 개인적 일탈 행위로 봉합될 단순 사안을 과잉 응원 등의 행태를 통해 부러 판을 더욱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물론 새누리당이나 검경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실제로 다분히 의도적인 흐름으로 읽히고 있긴 합니다.  과도한 제스처는 흡사 지도자를 향한 북한 인민들의 열광적인 환호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만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칫 세계적인 웃음거리로 전락할 가능성마저 엿보입니다. 

 

무엇이든 지나칠 경우 아예 하지 않음만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정작 우리가 잘못한 점이 있다면, 이러한 류의 피습 사태를 미리 예측하지 못한 채 리퍼트 대사에 대한 경호를 소홀히 했다는 부분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미국 정부에 정중히 사과하고, 차후 경호에 대한 철저한 약속과 그의 실제 이행으로 이어지면 될 문제입니다. 

 

우리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민간에서마저 이렇듯 저자세로 일관할 경우, 그토록 끈끈하다는 한미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외교 관계에 있어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더욱 요원해져갈 뿐입니다.  우리가 늘상 입버릇처럼 말해오던 한미 동맹 및 한미 관계 강화가 이러한 의미는 결코 아니지 않을까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