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임산부배려석 인형, 보편적 상식에 기댄 또 하나의 실험

새 날 2018. 7. 1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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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시간대면 누구나 바쁘다. 직장인이라면 출근을 서둘러야 할 테고 학생이라면 학교에 늦지 말아야 할 테니 말이다. 동시간대에 모두가 일제히 움직이다 보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대중교통 전철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할 정도로 늘 북적거리기 일쑤다. 발 디딜 틈조차 없다. 특히 환승에 가장 가까운 특정 출입구의 경우 환승역 한 두 정거장을 앞두고서 가장 붐비는 게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 날도 여지없었다. 환승을 해야 했던 난 가장 빠른 코스로 연결된 출입구 앞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몸뚱아리만 보전하고 있던 찰나다. 그 때였다. 누군가 앞 사람과 나 사이의 공간이라곤 일절 찾아볼 수 없는 틈을 용케도 비집고 지나간다.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다. 아울러 지나간 이후에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조차 없었다. 무턱대고 헤집고 지나간 것이다. 한 정거장을 이동하는 사이 무려 세 사람이 비슷한 방식으로 내 앞을 파고 들었다. 이들로 인해 놀라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가장 복잡한 출입구의 양쪽 옆 출입구로 자리를 옮기기 위한 시도로 읽힌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다. 덕분에 조금만 서두른다면 환승에 가장 가까운 출입구보다 되레 환승하는 데 있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행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던가,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직장이나 학교에 가기 위해 서둘러야 하는 심정은 백번 이해되고도 남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니 말이다. 허나 그 시각엔 당신들만 바쁜 게 아니다. 우리 또한 매우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에게 불편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아울러 한 걸음 앞선다고 하여 시간을 크게 앞당기는 것도 아닌 까닭에 그냥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서두를 뿐이다. 객차 내부가 한가하다면 이러한 이동 방식이 문제가 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출근 시간대의 전철 안은 주변 사람들의 호흡과 땀냄새를 고스란히 흡입해야 할 정도로 비좁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


남보다 단 한 발자욱 앞서겠노라는 요량으로 그 혼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불편을 초래하는 건 얌체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찜통더위가 본격화된 요즘에는 불쾌지수마저 높이 치솟는 바람에 타인에게 물리적인 피해와 동시에 자칫 감정에도 상처를 입힐 여지가 다분하다. 아침부터 불쾌한 감정으로 시작할 경우 그 날의 일진이 무척 사나워질 수 있으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에 따른 영향권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 알다시피 감정은 행위를 지배한다. 행위는 감정의 종속변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전철에서의 얌체족은 우리 주변에 널렸다. 아주 흔하디흔한 존재다. 이를테면 줄을 제대로 서지 않고 승객이 아직 하차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승차하려는 사람들로 승강장은 여전히 붐빈다. 이들로 인해 승객들이 한데 뒤엉켜 혼잡해지고 모두가 불편해지는 사례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임산부배려석은 또 어떤가. 안타깝게도 이 좌석은 이름만 배려석일 뿐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거리낌 없이 와 앉는, 그냥 일반석과 다름 없다. 배려라는 낱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없애버리자는 취지의 주장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하지만 자신들이 무용지물로 만들어놓고 그럴 바에야 없애버리자는 게 과연 온당한 주장일까?

 

ⓒ뉴스1

 

서울교통공사 등 전철 운영 주체가 수시로 방송을 통해 임산부배려석을 비워둘 것을 호소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고, 전철 객차 내부와 역내 곳곳에도 이와 관련한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좌석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 하고 있다. 일단 누군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아무리 임산부라고 해도 자리를 비워 달라고 호소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간파, 임산부가 언제든 임산부배려석으로 찾아 오면 곧바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캠페인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이를 해석하고 행위로 옮기고 있는 모양새다. 배려심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캠페인에 대해 일부 삐딱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남성들은 가뜩이나 여성전용칸 등 여성을 위한 정책이나 제도 등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임산부를 위한 별도의 자리까지 운영하는 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아니냐며 불만을 토로하거나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시라. 임산부는 비단 여성이기 때문에 배려하자는 게 아니다. 성별과 관계없이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약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보호를 받아야 하며 배려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제도다. 약자는 여러모로 부족한 조건과 불편한 환경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들이다. 아울러 강자라고 하여 항상 강자일 수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약자라고 하여 항상 약자의 지위에 있는 것만도 아니다.


특정 영역에서는 강자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다른 영역에서는 얼마든 약자적 지위에 놓일 수 있다. 예컨대 누구든 노화를 피해갈 수 없는 이상 우리 모두는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반드시 사회적 약자의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는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하며 성장 발전해 왔다. 지속성장을 위해서라도 약자는 배려 받아야 하며 이들에게 조금 더 많은 사회적 혜택이 제공돼야 함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전철 운영 주체는 그동안 임산부배려석의 자리 비움을 유도하기 위해 분홍색 디자인으로 바꾸고 캠페인을 벌여오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그나마 캠페인 초창기에는 임산부가 아닌 사람이 임산부배려석에 앉을 경우 잠깐의 주저함 등 주변인의 눈치라도 보는 듯싶었으나 근래엔 거리낌 따위는 아예 없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대전지하철과 서울공항철도가 임산부 배려석에 인형을 놓아 자리 비워두기를 유도하고 나선 건 시민들의 보편적인 상식에 기대고자 하는 또 하나의 실험이다.

 

ⓒ뉴스1

 

효과는 생각보다 좋은 모양이다. 호평 일색이다. 임산부가 아닌 사람이 임산부 캐릭터 인형을 안고 자리에 앉아 있기에는 어지간히 뻔뻔하지 않고서는 매우 민망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법하니 말이다. 배려란 다른 사람을 생각하여 도와주거나 보살피려는 마음 씀씀이를 일컫는다. 앞선 사례에서도 살펴 보았듯 근래 우리 사회엔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구성원들이 부지기수다. 배려는 둘째치고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이들에게 상식이란 무언지, 그리고 부끄러움이란 무언가를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서울교통공사 역시 임산부 캐릭터 인형의 도입을 하루빨리 추진하기 바란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위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라면 강제로라도 이를 설득시키고 체화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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