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아날로그는 죽거나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새 날 2018. 1. 3.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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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편지를 직접 쓰고 받아본 지가 언제쯤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군에 입대하여 부지런히 쓰고 받았던 게 거의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득한 일이다. 요즘 군부대에서는 온라인을 통해 편지를 쓰게 하고 그 내용을 그대로 인쇄하여 당사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바뀐 모양이다. 여러모로 편리해지긴 한 것 같다. 하지만 디지털 활자로 입력하여 저장하고 이를 다시 인쇄해서 뽑아낸들 비록 눈에는 깨끗하게 들어올는지는 몰라도, 펜으로 직접 꾹꾹 눌러 쓴 그 정성과 그로부터 전달될 법한 감성까지 고스란히 담아낼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다.


사람들은 무언가 실체가 있고 손에 만져지는 그 느낌에 끌리는 경향이 짙다. 일단 나부터도 그렇다. 학창시절에는 샤프펜슬을 애용했는데, 지금은 왠지 깎는 일이 다소 불편하고 귀찮더라도 연필을 더 선호하게 된다. 연필이 주는 그 특유의 재질적인 안정감은 제아무리 비싼 샤프펜슬이라 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20세기 끝무렵에 등장한 PDA는 당시엔 대단한 요물이었다. 조그만 기기 안에 수십 권의 책이며, 게임 그리고 빼곡한 개인일정까지 웬만한 모든 개인정보들을 집어넣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진보한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디지털이 대세로 돌변한 지금 나는 다시금 다이어리를 펼쳐든다. 자유로운 기록과 직접 적는 방식으로부터 누릴 수 있는 평안함이 왠지 사고에도 더 많은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탓이다. 요즘엔 한 발 더 나아가 각종 펜을 구입, 펜글씨 연습도 하곤 한다. 더불어 펜으로 가능한, 이를테면 하얀 종이 위에 무작정 그림을 그려보는 등 또 다른 작업도 시도해보는 중이다. 


비록 형편없는 결과물이지만, 적어도 이 때만큼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기에 나름 좋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행위에 빠져드는 걸까? 손에 닿고 만져지는 물리적인 감각으로부터 오는 평안함과 안도감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비록 삐뚤빼뚤 적어내려간 글씨체에다 형편 없는 실력의 그림이지만, 펜과 종이 그리고 손에 의해 어우러지는 감각은 이를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리라. 행간이나 여백, 아울러 펜의 강약에 의해 달리 표현된 섬세한 부분까지, 심지어 점 하나로부터도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기호식품인 커피는 기계를 이용하여 빠르게 뽑아내는 아메리카노보다는 비록 느리지만 오로지 중력이라는 자연의 힘에 의지해 뽑아내는 드립커피와 콜드브루 방식의 커피가 더 좋다. 맛에서도 차이가 느껴진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지방 성분까지 뽑아내는 아메리카노는 씁쓸함이 맛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콜드브루 커피는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바디감이 느껴져 좋고, 드립커피는 담백하면서도 향과 맛에서 단연 뛰어나다. 


세상 여기저기서 아날로그 열풍을 말하곤 한다. 복고라는 표현도 흔히 사용된다. 모든 게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인 터라 비록 일부 영역에 불과하지만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현상을 두고 모두들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듯싶다. 한 발 더 나아가 누군가는 이를 아날로그의 반격이라고도 지칭한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인기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색스'가 최근 출간한 책의 제목이 바로 그러하다. 



관련 제품의 판매 결과에서도 해당 현상은 두드러진다. 옥션에 따르면 최근 한 달 동안 아날로그 문구 판매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급증했다고 한다. 만년필의 판매는 19배 이상 늘었으며 연필은 37%, 연필깎이는 29%나 증가했다. 다이어리의 판매 결과 역시 비슷했다. 소셜커머스 티몬에 따르면 최근 한 달 동안 다이어리의 판매량은 전월 대비 3배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연말연시라는 계절적인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는 전년도와 비교해도 38%나 늘어난 수치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졌노라는 방증이다.


디지털이 대세가 되어버린 세상, 하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아날로그를 찾고 이를 지향하는 건 왜일까? 한 마디로 물질성 때문이 아닐까? 사람 자체가 로봇마냥 똑같은 형태로 복제될 수 있는 형태가 아닌,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까닭이다. 디지털은 우리에겐 편리함과 속도감, 완벽함 따위를 가져다줄지언정 물리적인 실체까지 재현해내거나 그로부터 전달되는 감성까지 누리게 해줄 수는 없다. 


우리가 매끈한 샤프펜슬보다는 다소 거칠지만 재질감이 뛰어난 연필로부터 안도감을 느끼게 되고,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콜드브루와 드립 방식의 커피로부터 더 향긋한 풍미를 누리고 있듯이, 아울러 디지털 기기에 얼마든 기록을 남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이 재질의 물리적인 노트에 펜으로 꾹꾹 눌러 적는 기록으로부터 평안을 찾는 것처럼 아날로그란 결코 죽거나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복고 열풍은 더더욱 아니다. 작금의 현상을 열풍 내지 반격이라고도 말하지 말라. 세상이 존재하는 한 물질성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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