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묵직한 침묵이 따듯함으로 다가오는 영화 '침묵'

새 날 2017. 11. 3.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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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그룹의 오너 임태산(최민식)은 가수 유나(이하늬)와 교제하며 단꿈에 빠져 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은 흡사 젊은 청춘들 못지 않게 달달하기 그지없다. 유나는 임태산의 딸 미라(이수경)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등 둘 사이의 어색한 관계를 풀어보려 노력하지만, 유나를 향한 미라의 반감은 생각보다 크다. 태산 역시 유나와 딸 사이의 관계를 호전시키려 노력해보지만, 그가 사업 영역에서 성공을 거두며 경험했던 어려움 이상으로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미라는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클럽에서 시간을 소일하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미라에게 보여준 동영상이 그만 화근이 되고 만다. 유나가 다른 남성과 벌이는 섹스 동영상이었다. 가뜩이나 마뜩잖던 미라는 아버지 태산과 함께있던 유나에게 메시지를 보내 자신과 만나자고 재촉한다. 평소 미라가 접근해오는 일이 드물었던 터라 유나는 두 사람이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클럽으로 향한다. 



하지만 둘의 만남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있는 동안 유나가 그만 사고로 죽고 만 것이다. 경찰에 체포된 미라는 술에 취해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끔찍하게도 모든 정황은 그녀가 유나를 죽게 한 것이라 가리키고 있었다. 태산은 딸의 무죄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데...



임태산은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차가운 인물이다. 심지어 권력도 돈으로 살 수 있으며, 죗값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돈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큰 기업을 경영하고 이를 유지하면서 그 나름으로 터득한 처세술 가운데 하나 아니었을까 싶다. 모르긴 몰라도 유나와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재력 덕분으로 여겨진다. 


부와 사회적 지위, 명성 그리고 사랑까지 이 모두를 동시에 움켜쥔 그는 일견 남 부러울 것 없는 사람처럼 비친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식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언니라 지칭하라며 태산으로 하여금 미라를 다그치게 했던 새 엄마 유나는 그녀에게 있어 눈엣가시이자 수치 그 자체였다. 평소에도 유나를 벌레 쳐다보듯 했던 미라는 사건이 불거지던 그날 유나의 동영상이 공개된 뒤로는 그녀를 더욱 경멸했다. 



그날 자리를 함께했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사고로 숨졌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만취한 바람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다만 평소 두 사람의 좋지 않았던 관계가 세간에 알려지고, 유나의 섹스 동영상이 공개됨과 동시에 미라가 그녀를 만났던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세상 모든 것들은 하나 같이 미라를 유나 사망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영화는 미라가 유나 사망 사건의 용의자로 떠오른 뒤 이를 무마하기 위한 태산의 고군분투 장면과 이윽고 벌어지는 치열한 법정 다툼, 새로운 목격자의 등장 및 반전을 한 축으로 하며, 차후 범인이 밝혀진 뒤 점차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사건의 전모와 그의 이면을 또 다른 축으로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 동일한 사건에 연루되면서 실마리가 풀리기보다는 되레 수렁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든다. 



이어 반전과 반전이 거듭되고, 법정 다툼이 이어지면서 극은 점차 사건의 실체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선다. 극의 시작부터 종료 시점까지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감과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하는 짜릿한 묘미를 제공해준다. 



최민식의 선 굵은 연기는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대한민국 검사 앞에서조차 당당함을 결코 내려놓지 않던 그는 이렇듯 세상 모든 것을 움켜쥐고서도 비단 딸 자식 앞에서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지 그로 인한 고뇌와 고충을 침묵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비록 돈으로 엮인 사랑인 데다가 일방적인 사랑에 불과할지라도 어쨌든 영화 속에서 그가 보여준 유나를 향한 진심과 사랑만큼은 지고지순하기 이를 데 없다. 반전이 거듭되고 결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까닭에 그의 진심을 읽고 이를 쫓아가기가 녹록지는 않으나, 결국 극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스크린 위를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서 임태산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울러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쉼표와 긴 여운을 남김과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이해를 구한다. 



연인의 사망 사건이 발생하고, 표면상 그리고 정황상 용의자가 쉽게 특정되나 법정 싸움이 지속됨과 동시에 목격자 등 새 인물이 속속 등장하면서 사건은 더욱 꼬여가는 양상이다. 특히 법정 다툼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짐작되는 이번 작품은 미스터리한 사건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등 관객들의 관심과 시선을 의도적으로 자꾸만 흐트러뜨리려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영화의 방점은 사실상 임태산이라는 인물에 찍혀 있다. 그의 묵직한 침묵이 의외의 따듯함으로 다가오기에 더욱 가슴 절절하다.



감독  정지우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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