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오직 김혜수라 가능했던 영화 '미옥'

새 날 2017. 11. 1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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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최무성)이 이끄는 기업 '재철그룹'은 남다른 방식으로 사세를 키워온 회사다. 유력 기업인과 정치인 등의 비리를 포착, 이를 미끼로 금품을 착복하거나 사업권을 빼앗고,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와 등가 교환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왔다. 재철그룹의 비서실장이자 김재철의 최측근으로 복무하면서 회사와 함께 성장해온 나현정(김혜수)은 여전히 사내에서 영향력이 높지만, 조용히 은퇴를 준비하고 있던 와중이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기에는 변수가 적지 않았다. 


한편 재철그룹의 안과 밖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해온 데다가 온몸을 던져 충성하던 임상훈(이선균) 기획실장은 그런 와중에도 오롯이 나현정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과의 인물이다. 과거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와 닿았던 애틋한 인연 때문이다. 사랑인지 집착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녀를 향한 그의 복잡미묘한 감정은 개인적인 일탈 행위로 재철그룹에 발목을 잡힌 최대식(이희준) 검사와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히면서 더욱 복잡해져간다. 



김재철의 오른팔이라 여겨온 굳건했던 신념은 최대식의 관여와 동시에 균열이 발생하고, 더불어 나현정을 향한 감정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부장검사의 딸과 결혼한 최대식은 출세 지향의 인물로서, 오로지 자신의 비리를 덮겠다는 일그러진 욕망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들어찬 채 의도치 않게 그들 사이로 파고드는데...



영화는 과거의 끈끈한 질곡이 현재의 삶을 옭아매고 있어 그로부터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나현정, 그리고 그녀를 흠모하면서 오로지 나현정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임상훈, 아울러 자신의 일탈 행위가 세상에 탄로날까 봐 전전긍긍해 하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최대식 검사, 이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각기 욕망을 쏟아내고 다시 이를 주워담는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나현정은 어지간한 남성을 압도할 만큼 냉혹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극중 외모 이상의 차갑고 냉철한 면모를 선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는 사실상 상처투성이다. 그로 인해 그녀가 지향하는 삶과 임상훈의 그것과는 간극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임상훈은 과거의 인연 때문에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오로지 나현정만을 바라보는, 그 역시 나현정만큼 결핍이 꽤나 많은 인물이다.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김재철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히면서 결국 평상심을 잃고 마는 그다. 



최대식 검사는 치졸하면서도 이중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 낮에는 검찰청에서 흡사 정의로운 검사인 양 행세하지만, 밤이면 젊은 뭇여성과 호텔방을 전전하는, 그렇고 그런 인물이다. 심지어 하룻밤 상대였던 여성을 다시 찾아가 사랑을 구걸하는, 극강의 찌질한 면모마저 갖췄다. 이쯤되면 제대로 웃기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반쯤 걸친 안경 너머로 드러난 그의 민낯은 어쩌면 그리도 그의 행동과 찰떡궁합이던지.. 배역을 맡은 이희준이 그만큼 능청스럽게 연기를 잘 펼친 덕분 아닐까?



찌질함과 치졸함이 대한민국 검사라는 우월적 지위와의 화학적 결합을 통해 욕망으로 변신을 꾀하는 순간, 어느덧 그만의 잔인한 면모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다. 알고 보니 내면에 괴물 한 마리를 키우고 있던 그다. 이러한 그의 욕망이 각기 다른 색깔의 욕망과 충돌하니 불꽃은 더욱 격렬하게 튈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이들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욕망을 열심히 훑고, 관객은 이를 쫓느라 여념이 없다. 



이 영화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보다 나현정 배역의 김혜수가 아닐 수 없다. '미옥'이라는 제목만으로도 그녀의 역할을 기대케 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평소 카리스마 그리고 걸크러쉬의 대명사격이었기에 본격 느와르 액션 장르에 출연한 김혜수가 과연 어떠한 색깔을 드러내고 매력을 뿜어내느냐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기대가 컸다. 실제로 극중 강렬한 헤어 스타일과 의상만으로도 기대감이 한껏 부풀려지던 와중이다.  



허나 지나치게 외적인 요소만 도드라졌던 건 아닐까? 그녀의 파격적인 헤어 스타일과 의상에 비해 다른 영역에서는 그다지 감흥이 따라오지 않는다. 나정현이 상대적으로 대화가 적고 감정을 최대한 억제해야 하는, 내면 연기가 많은 배역임은 틀림없으나, 그럼에도 무언가 결정적인 한 방이 아쉬웠다. 화려한 외양에 비해, 아울러 장르를 아예 느와르라고 표방하고 나선 것에 비해 액션 신이 다소 미흡했던 건 엄연한 사실이다. 


얼마 전 개봉한 한국 영화 '악녀', 미국 영화 '아토믹 블론드'와 비교해보더라도 이번 작품을 통해 누릴 수 있었던 장르적 쾌감은 전작들에 비해 확실히 모자라는 느낌이다. 김혜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차갑고 시크한 카리스마가 온전히 표출되지 못한 게 다소 아쉽다. 극중 김여사로 분했던 안소영의 카리스마가 오히려 더 돋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배우 김혜수가 아니면 과연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우리나이로 올해 48세다. 곧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명의 거친 남성을 동시에 상대하는 고난이도의 액션은 물론, 무거운 장총을 들고 총격 신을 선보이는 등 나이를 잊은 듯한 과감한 액션 연기를 펼쳐 보인다. 


뿐만 아니다. 때로는 부드러운 모성애를 드러내며 극과 극의 연기를 오고 간다. 임상훈 앞에서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고 차가웠지만 알고 보면 사실 그녀의 진짜 내면은 결코 그렇지 않았듯 말이다.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내면의 에너지를 한껏 끌어올린 뒤 이를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연기는 연륜과 카리스마 그리고 연기력을 고루 갖춘, 오로지 김혜수였기 때문에 가능했음직하다. 그녀의 과감했던 멋진 첫 액션 연기 도전에 박수를 보내며, 조만간 스크린을 통해 또 다른 액션 연기로 거듭 만나기를 희망한다. 



감독  이안규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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