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시간과 소통이 다듬어놓은 욕망

새 날 2017. 2. 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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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위치한 우수리 해변은 '글래스 해변'이라는 별칭으로 통한다. 신기하게도 본래의 이름보다 이 별칭이 더 유명한 곳이다. 물론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이곳은 과거 미국과 함께 냉전시대의 한 축을 이루던 소비에트연방국가(소련)가 폐유리병을 처리하던 아주 오래된 쓰레기장이었다. 


KBS 영상 캡쳐


이곳 해변엔 병 형태의 생활 쓰레기들이 마구 버려졌다.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겐 삶의 흔적일수도 있는 맥주며 와인, 보드카, 샴페인 등의 술병과 그 종류를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유리병들이 이곳에 즐비하다. 이후 깨진 유리병 조각들이 널부러진 채 나뒹굴면서 우수리 해변은 사람들로부터 점차 외면 받기 시작한다. 인간이 자연을 훼손시킨 대가는 참혹했다. 다시는 찾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해변이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치된 이 해변에 언젠가부터 형형색색의 조약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KBS 영상 캡쳐

이 예쁜 색상의 돌들은 흡사 다이아몬드나 루비, 사파이어 등과 비견될 만큼 아주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물론 짐작하는 대로 이 조약돌의 정체는 바로 사람들에 의해 이곳 우수리 해변에 버려진, 삶과 욕망의 여러 흔적들 가운데 일부인 폐유리병이었다.

KBS 영상 캡쳐

이 보석 같은 조약돌들은, 버려진 유리병들이 산산조각나고 깨져 날카로운 흉기로 돌변, 이를 버린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위협해오면서 급기야 해변을 떠나거나 외면하기 바빴던 이들로 하여금 이곳으로 다시 불러모으는 유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해마다 여름이 돌아오면 많은 관광객들이 이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현상을 보기 위해 일부러 이곳을 찾아와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긴단다. 

KBS 영상 캡쳐

하지만 사실 이의 이면을 들춰보면 그다지 신비로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커다란 암석이 비바람에 풍화되어 조각나고 이들이 물에 의해 침식되면서 둥글둥글한 형태의 자갈돌을 만들어내듯이, 지극히 과학적인 현상에 의해 날카롭고 뾰족했던 유리 파편들 또한 부드러운 형태로 다듬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적지 않은 것들을 생각케 한다. 우선은 언론보도에서처럼 인간이 생산해낸 욕망의 찌꺼기로 더럽혀진 자연이 군소리 없이 이를 아름다운 보석으로 재탄생시켜놓았다는 아주 고마운 사실을 상기시킬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과의 접촉 및 소통을 통해 뾰족했던 것들이 무디어지며 쓰레기에 불과하던 것들이 점차 쓸 만한 물건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사람 역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시쳇말로 연식이 조금 되면, 유난히 까칠했던 성격이 많이 다듬어지곤 한다. 아무리 괴팍하고 삐딱한 성향의 사람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부드러운 인품으로 변모, 비로소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경우를 우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글래스 해변의 유리조각이 보석으로 변모해가는 현상이나,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이 늘면서 인간 됨됨이가 부드러워지는 과정은 일견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베리안타임즈

만약 유리병을 해변이 아닌 땅속에 묻었다고 가정해보자.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유리가 흙에 묻혀 다시 흙으로 분해되는 데는 무려 100만 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는 흔히 호모에렉투스가 진화를 거듭, 오늘날의 인간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에 견주어질 정도로 긴 흐름이다. 반면 해변에 버려진 유리병은 공기와 바닷물의 접촉에 의해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져 불과 수십 년만에 보석 같은 형태로 변모할 수 있었다.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과의 소통 및 접촉이라는 풍화 침식 작용을 통해 인간미가 다듬어지고 날카로움이 점차 무뎌져간다.


글래스 해변의 조약돌이 우리에게 보석처럼 다가오는 이유는 비단 시신경을 즐겁게 해주는 형형색색의 빛나는 색감과 아기자기한 형태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세월의 흐름과 사회적 접촉이 사람의 됨됨이를 다듬으며 헛된 욕망을 가라앉혀온 것처럼 시간과 자연이 쓰레기에 불과한 그 날카롭고 뾰족했던 유리조각을 제법 쓸 만한 존재로 다듬고 또 다듬어온 묵직한 현실을 이번 사례를 통해 몸소 확인 가능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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