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열정과 신념을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 '플로렌스'

새 날 2016. 8. 2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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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플로렌스(메릴 스트립)는 대통령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만큼 아주 당차고 똘똘한 음악 신동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을 향하던 꿈은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며 좌초하게 된다. 더구나 결혼과 동시에 남편으로부터 전염된 매독은 왼손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등 그토록 원하던 음악으로부터 그녀를 더욱 멀어지게 하는 유인이 되고 만다. 하지만 잃었던 기회가 다시 찾아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상속 받은 유산 덕분에 그녀는 음악에 대한 꿈을 다시금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플로렌스는 베르디 클럽을 설립, 유수의 음악가로부터 성악 레슨을 받는 등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노래에 반주를 넣어 줄 피아니스트가 급히 필요, 공모 절차를 거치게 되는데,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친 맥문(사이몬 헬버그)이라 불리는 시골 청년이 이에 낙점된다. 남편이자 매니저인 베이필드(휴 그랜트)는 플로렌스의 음악적 열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의 숨은 노력 덕분에 플로렌스는 수 차례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고, 마침내 당대 최고의 공연장이라 할 수 있는 카네기홀에서의 공연마저 성사되는데...



역사상 최악의 음치 소프라노로 불리는 '플로렌스 포스터 젱킨스'의 실재했던 삶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그러니까 실화다. 그녀는 실제로 1944년 10월 25일 카네기홀에서의 공연을 가졌고, 비록 예술적 차원에서의 논란과 음악계 일각의 조롱 및 비난을 야기하긴 했으나 어쨌든 이는 전석 매진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야기는 치명적인 음치의 소유자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세기의 음치 소프라노 플로렌스 여사와, 그녀가 공연할 때마다 객석의 관객을 사전에 조율,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만 채우고, 언론에서 좋지 않은 시각의 비평이 나갈 때마다 이를 모두 회수하는 등 플로렌스의 꿈과 열정에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내조 및 외조 모두에 올인해 온 멋진 남편 베이필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골 출신의 별 볼일 없는 피아니스트에 불과했으나 플로렌스의 마음을 빼앗은 끝에 그녀의 파트너로 낙점, 플로렌스의 음치에 최적화된 환상적인 반주 솜씨를 선보이게 되는 맥문, 이 세 사람의 구도로 그려진다. 



실제로는 출중한 가창 실력을 갖춘 메릴 스트립의 능청스러운 음치 연기는 시종일관 관객의 웃음을 유발한다. 여기에 그녀의 열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몸을 사리지 않은 채 헌신하는 베이필드와 엉겁결에 플로렌스 사단의 일원이 되긴 했으나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짓자 행보를 보이면서도 용케 플로렌스의 음치 소프라노에 잘도 적응해가는 맥문의 좌충우돌 열연도 흥미로운 요소다.



플로렌스 여사에게 있어 베이필드는 두번째 남편이다. 첫 남편으로부터 옮은 매독은 그녀의 심신을 피폐하게 했고, 이로 인해 베이필드와는 어쩔 수 없이 정신적인 동반자적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베이필드는 플로렌스를 아내로 두고 있으면서도 캐슬린(레베카 퍼거슨)이라는 애인과 별도의 삶을 꾸리고 있다. 


물론 플로렌스와 캐슬린 두 사람 모두 이를 용납하고 있으며, 베이필드라는 멋진 남자의 공유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는 입장이다. 아주 가끔 이 공유 법칙이 깨지며 불협화음이 발생하곤 하지만, 그 때마다 베이필드는 슬기롭게 위기를 넘기곤 한다. 캐슬린 역을 맡은 배우는 '미션임파서블 : 로그네이션' 편에서 탐 크루즈의 상대 여성으로 나왔던 매력적인 비주얼의 레베카 퍼거슨이다.



세 사람의 좌충우돌 해프닝은 더없이 우습고 재미있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1940년대의 뉴욕을 스크린 위에 그대로 재현, 고풍스러운 거리와 각종 소품 그리고 당대의 의상을 관찰토록 하는 재미 또한 제법 쏠쏠하다. CG인지 아니면 실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출시됐을 법한 다양한 차종들이 거리를 지나는 모습도 꽤나 흥미로운 구석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때라곤 전혀 묻지 않은 듯한 플로렌스의 면모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력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일 테고, 원래 노래에 일가견이 있는 그녀이기에 일부러 음치 흉내를 내는 일이 훨씬 힘들었으리라 짐작된다. 플로렌스 여사가 생전에 남긴 레코드의 일부가 영화 막판에 흘러나오는데, 이는 메릴 스트립의 음치 흉내가 대충 이뤄진 게 아님을 입증할 만한 물증이다. 실제의 플로렌스를 고스란히 옮기기 위해 피눈물 나는 연습이 이뤄졌으리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베이필드 역의 휴 그랜트는 나이가 들어도 뭇여성들을 심쿵케 할 만큼 여전히 멋지다.



음악계에서는 플로렌스를 두고 얼마든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릴 수 있다고 생각된다. 성악이라는 예술 장르를 대중들의 한낱 조롱거리로 전락시켰으니 말이다. 아울러 아무리 음악적 열정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애초 음치를 성악이라는 장르에 발을 들여놓게 만들거나, 더 나아가 공연까지 성사시킨 남편이자 매니저인 베이필드의 행위에 대해서도 얼마든 비난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음악이라는 예술적 잣대로부터 한발자욱 물러나 조금은 멀찍이서 플로렌스를 바라보면 어떨까? 음악적인, 특히 성악가적인 재능이나 실력은 월등히 떨어진다 해도 플로렌스가 보여준 한결 같은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뜻을 이루려는 끊임 없는 노력은 우리에게 충분히 귀감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특히 공연 도중 관객들이 보이던 냉소나 조롱 그리고 비아냥보다는 칭찬과 응원이 사람의 열정과 흥을 더욱 돋워, 자신이 지닌 이상의 기량을 쏟아내게 해 준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꿈을 이룬 한 여성과, 그녀의 신념을 꿋꿋하게 지키고 이를 잃지 않도록 끝까지 곁에서 도와준 한 남성의 잔잔한 이야기는, 우리의 메마른 감성을 흡족하게 적시고도 남으리라.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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