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따뜻한 위안을 주는 영화 '덕혜옹주'

새 날 2016. 8. 4.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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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가 환갑에 맞이한 덕혜는 늦둥이의 특권이랄 수 있는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황실 주변으로는 서슬 퍼런 일제의 망령이 어른거리며 시간이 갈수록 옥죄어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덕혜옹주만큼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황실 이곳 저곳을 헤집으며 해맑은 표정으로 쏘다니곤 했던 덕혜옹주다. 한편 이완용과 한택수(윤제문) 등 매국노들이 온통 득시글거리는 조선 황실에는 까닭 모를 비운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고종이 승하한 건 이 즈음이다. 


덕혜옹주는 어릴적부터 기개가 남달랐다. 간신들의 일본 앞잡이 노릇에도 굴함 없이 꼿꼿하게 자신의 소신을 드러냈던 그녀다. 그러던 어느날의 일이다. 일제는 눈엣가시였던 고종이 승하하자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 지우기에 본격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그의 일환 중 하나가 다름아닌 13세에 불과한 덕혜옹주를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녀를 둘러싼 분위기는 덕혜옹주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못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는 그렇게 일본으로 보내지는데...



이 작품은 권비영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 '덕혜옹주'가 원작이다. 그러니까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여 만든 일종의 '팩션' 장르의 영화다. 일본으로 강제 유학길에 오른 뒤 조선의 황녀임에도 불구하고 해방을 맞이하고서도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그토록 원하던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던, 그래서 국가는 물론 대중들에게까지 서서히 잊혀져 가던, 조선시대의 마지막 황녀로서의 운명적인 삶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해방을 맞이하고 십수 년이 흐른 뒤 한일 외교 정상화를 위한 물밑 움직임이 이뤄지던 시기, 고종이 살아 생전 덕혜옹주와 혼사를 약속했던 청년 김장한(박해일)이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되어 다시 일본을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일본 방문은 실종된 덕혜옹주의 행방을 찾기 위함이었다. 물론 김장한의 머리엔 새하얀 서리가 여기 저기 내린 상황이었고 한쪽 다리는 과거 덕혜옹주와 함께 시도했던 상해 망명의 상흔으로 인해 절뚝거리는 처지였다. 그를 30년 만에 맞이한 복동(정상훈) 역시 망명 시도 당시 그들과 함께 겪었던 결코 지울 수 없는 고초를 떠올리며 이내 감회에 젖어든다. 



덕혜옹주의 바람은 소박했으며 한결 같았다. 조선을 완전히 지우려는 일본의 치밀한 계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밟게 된 일본 땅으로부터 빠른 시일 내에 벗어나 다시금 고국 땅을 밟는 일이었다.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그녀의 기개는 매국노 한택수의 밀착 감시와 끝없는 괴롭힘이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옹골져가고 있었다. 더구나 독립군 자손인 김장한과의 인연이 맞닿은 뒤로는 되레 더욱 단단해져 갔다. 



일제의 압박이 거세질수록 그에 비례해 상해를 거점으로 한 임시정부의 움직임 역시 긴박해져 갔다. 더불어 일본 본국에서의 독립운동도 점차 고조되던 찰나다. 영친왕의 망명을 성사시키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수면 아래에서의 움직임은 김장한을 매개로, 어느덧 덕혜옹주에게로까지 그 끈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택수는 덕혜옹주의 수족을 하나 둘 떼어내더니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시종이던 복순(라미란)을 조선으로 귀국시키며 마침내 그녀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심지어 일본인과의 강제 결혼을 성사시키며 가뜩이나 바닥까지 떨어진 조선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겨버리고 만다. 


덕혜옹주의 고국을 향한 사랑은 오로지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힘든 와중에도 일본에서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에게 한글교실을 열어 우리의 혼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곤 했다. 그러나 일본에 던져진 뒤 고립된 덕혜옹주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갈수록 요원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강제노역장으로 끌려간 당시 조선인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상상 이상의 고초를 겪고 있었다. 현실은 귀로 익히 들어 오던 것보다도 훨씬 끔찍스러운 참상 그 자체였다. 이들 앞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황녀의 신분으로 어쩔 수 없이 일제를 칭송하고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연설을 해야 했던 굴욕적인 상황, 덕혜옹주는 일본어로 된 연설문을 읽어내려가다가 차마 마저 읽지 못하고, 몹시 차분했지만 진정성이 담긴 자신의 진짜 속내를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하며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등 일제로부터 모진 수난을 당하고 있던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에게 힘을 북돋는 장면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손예진의 연기로부터는 조선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가 실제로 겪었을 법한 내면의 고통과 번민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전도 유망한 젊은 청년에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쇠어 연륜 깃든 소신 있는 기자 역할까지, 박해일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이번에도 폭이 넓다. 복순 역의 라미란은 시종일관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웃음을 던져주는 역할을 도맡고 있으나, 막판에는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덕혜옹주의 조카이자 독립군으로 잠시 모습을 비쳤던 고수는 스크린에서는 간만에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반가웠다. 


덕혜옹주는 황녀이기 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이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마음은 황녀라고 하여 일반인들과 다를 리 없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닐 법한 보편적인 심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르기 전 어머니 양귀인(박주미)의 발을 정성껏 닦아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덕혜'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랐던 건 아마도 황녀로서가 아닌 자연인으로서 어머니의 사랑을 누리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으리라.



자연인 이덕혜였다면 고국 땅으로 돌아오는 길이 이토록 험난하거나 멀지는 않았을 테다. 결국 황녀라는 신분 때문에 그녀는 고국과 대중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하고 만다. 영화 관람 내내 안타까움은 물론 무언가 죄를 짓는 것 같아 좌불안석이었는데, 다행히 그녀가 영화 속에서 고국 땅을 밟는 순간, 그 무거웠던 짐 따위를 비로소 내려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삶 뒤로는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지난하면서도 고단한 싸움이 함께 아로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부채 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이는 거짓일지도 모른다. 덕혜옹주의 귀국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뭉클한 감정에 앞서 그러한 부채 의식을 조금은 덜어낸 기분이 먼저 들었다. 결국 이 영화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을 주고 있다. 더구나 황녀라는 특수한 신분보다는 자연인 이덕혜라는 사람의 따스한 인간적인 면모는 가뜩이나 더운 날씨로 인해 힘들어할 우리들을 더욱 깊이 감싸 안는다.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다.



감독  허진호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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