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공간은 우리의 삶을 기억한다 '벽은 속삭인다'

새 날 2016. 5. 1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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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으로 이사 온 파스칼린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새 삶을 꿈꾸고자 하는 중년 여성이다. 하지만 새로운 공간은 이사 온 첫날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며 그녀를 강하게 거부하는 느낌이다. 아니 공간이 거부한다기보다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 이곳은 무언가 거북하기 짝이없다. 밤새 구토와 현기증으로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금 곱씹어 봐도 새로 이사 온 이 아파트처럼 완벽한 공간을 찾기란 쉽지 않은 노릇인데,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는 그 흔한 층간 소음도 없으며, 이웃 간의 다툼 또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다음날, 그리고 또 다음날 밤 역시 증상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녀는 경험상 미심쩍은 대목 때문에 이곳과 관련한 사실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얼마후 그녀는 과거 이곳에 살던 한 여성이 연쇄살인범에 의해 살해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듣는다. 범인은 당시 모두 7명의 여성을 살해했는데, 그중 첫번째 희생자가 파스칼린이 잠을 자던 바로 이곳에서 숨졌다고 한다.

 

그녀는 비로소 깨닫는다. 왜 이 공간에만 와있으면 가위에 눌리거나 숨쉬기조차 버거울 만큼 현기증이 나고 구토가 발생했는지.. 물리적으로는 더없이 살기 좋은 곳이었으나 공간에 스며든 누군가의 아픈 삶 때문에 파스칼린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던 셈이다. 이사 온 지 불과 며칠만에 다시 짐을 꾸린 그녀다. 아울러 이곳에서 희생된 여성에 대해 연민을 품게 된 것도 그와 동일한 시점이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금 이곳을 찾아와 과거의 사건을 복기하며 숨진 여성을 위해 추모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다. 그녀를 죽인 연쇄살인범이 수감된 교도소를 직접 찾아가 마음 속으로나마 그를 완전히 가두어 두고, 그에 의해 희생된 다른 여성들의 공간을 차례로 찾아 추모하는 의식을 치르기에 이른다.

 

작가는 특이하게도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공간이란 소재에 천착하고 있는 듯싶다. 가상의 인물을 통해 오롯이 공간에 스며들어있을 법한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생활하는 많은 공간은 어쩌면 단순한 물리적인 형태의 건물에 불과할지 모르나 실은 수많은 사람이 거쳐갔을 테고, 때문에 그들의 온갖 희노애락이 이 공간과 함께해왔을 법하다. 우리 앞에 가로놓인 벽은 비록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으나, 공간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일들을 그저 묵묵히 지켜 봐오며 그 흔적들을 모두 품어왔음직하다. 

 

 

공간은 참으로 묘한 녀석이다. 비록 생명체가 아닌 사물에 불과하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 경우 약간의 시간 흐름만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금세 티가 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짦은 시간에 폐허로 변해버리는 사례를 우린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며, 집의 방 하나를 비워둔 채 그냥 방치할 경우 조만간 엉망이 되는 현상도 쉽게 확인 가능하다.

 

반면, 같은 공간이라 해도 어떤 이가 살고 있느냐에 따라 그곳의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 되곤 한다. 그렇다면 기르던 개가 주인을 닮아가듯, 공간 역시 사람을 닮아가는 성질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도 아니면 사람의 흔적이 공간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발현된 결과물일수도..

 

파스칼린에게는 굳이 기억하여 꺼내고 싶지 않은, 꼭꼭 숨기고 싶은 상처 하나가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이쁜 어린 딸을 남편의 실수로 그만 잃고 만 것이다. 새로 이사 온 집 벽이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양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의 아픈 상처에 대해 그녀에게 속삭이던 반응을 파스칼린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동병상련과도 같은 과거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파스칼린은 자연스레 연쇄살인범에 의해 숨져간 7명의 꽃다운 나이의 여성들을 마치 자신의 자녀인 양 품기 시작한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이들의 흔적을 좇아 장미꽃을 놓아 추모하고, 과거를 되짚어 그들이 겪었을 아픔을 공유하며 이를 치유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뿐만 아니다. 공간에 집착하며 아픔을 추모하던 그녀의 마음은 어느덧 20세기 초 무고하게 숨져간 유대인들을 향하기 시작한다. 실수로 딸을 죽게 내버려둔 이혼한 남편을 향한 분노가 싹트기 시작한 것도 다름아닌 이 즈음이다.

 

우리가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공간과 관련하여 이곳을 거쳐간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으리라는 설정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실제로 집을 장만하거나 특별한 용도의 공간을 마련할 때면 우리는 여전히 전통사상인 풍수지리에 의존한 채 나름 까다롭게 고르곤 하는 것도 다름아닌 그러한 연유 때문이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공간과 연결지으려는 전통사상은 이 소설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화두와 어쩌면 같은 지점을 바라보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여성들의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공간과 자신의 평범하지 않던 삶이 마주하게 되자 마치 조건반사와도 같이 그에 격렬히 반응하게 되는 파스칼린이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점차 스스로를 고립시켜 나간다. 

 

공간은 과거와 우리의 삶을 오롯이 기억하며, 벽은 때때로 그에 대해 속삭인다.

 

 

저자  타티아나 드 로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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