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왠지 평소 하기 어려운 표현,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새 날 2016. 4. 23. 21:20
반응형

형사인 명환(지진희)은 아내와 사별하고 유치원에 다니는 딸 채윤(최지원)과 단 둘이 산다. 엄마의 부재는 채윤의 일상 곳곳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놓곤 한다. 명환은 이를 메워보려 노력하지만, 아직은 모든 게 어설프고 서툴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의 일이다. 명환은 채윤과 아쿠아리움에 가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유치원에서 아빠를 기다리던 채윤은 지나가던 뺑소니차에 치이고 만다. 소식을 접하고 급히 병원으로 향한 명환, 안타깝게도 채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까칠하기로 말하자면 거의 정상급에 해당하는 배우 한서정(성유리), 그리고 그녀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허태영(김성균)은 10년 동안 인연을 쌓고 있는 사이이다. 무명인 그녀를 드라마의 주연급으로 성장시킨 태영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그는 그녀의 돌출 행동에 따르는 뒷감당을 처리하느라 늘 고되고 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태영의 서정에 대한 감정은 매니지먼트의 사장과 소속 배우와의 관계를 넘어 애틋하지만, 굳이 이를 내색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녀의 성공만을 바라며 열심히 뛰어왔다. 그러던 그가 급작스레 쓰러지고 만다.

 

 

과거 복싱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최강칠(김영철)은 병원에 입원한 처지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를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다. 전성기 시절 그와 쌍벽을 이루던 비운의 선수 홍종구(이계인)가 같은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다. 홍종구는 최강칠에게 유일한 1패를 안겼던 핵주먹의 소유자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대결은 석연치 않은 사건 때문에 무산됐고, 이후 홍종구는 권투계를 영원히 떠나게 된다. 최강칠은 홍종구의 등장이 내심 불편하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를 흠집내기 위해 험담을 늘어놓기 바쁘다. 그러던 어느날 결국 두 사람은 병원 내에서 과거 이루지 못했던 승부를 결정짓기로 하는데...

 

 

이 영화는 서로 다른 세 가지의 사연과 이야기를 엮어 동시에 풀어나가는 방식의 옴니버스 작품이며, 특정 계층만을 타깃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부모와 어린 자녀, 젊은 청춘들의 사랑, 그리고 노년의 우정 등 작품의 소재가 전 연령층으로부터 공감대를 얻게 할 수 있을 것 같고 이를 아우를 만한 폭넓은 관객층을 대상으로 하는 까닭이다. 결국 모든 계층에 두루두루 어필하는 영화다. 

 

 

자신의 자녀를 죽게 한 범인 그리고 가해자의 자녀와 이어지는 묘한 인연, 마음을 두고 있으면서도 배우와 매니저라는 특수관계 때문에 이를 내색하지 못한 채 일정 거리를 유지해오다 결국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는 안타까운 설정, 복싱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음에도 과거 마음의 짐으로 와닿던 한 인물의 등장으로 평상심에 균열이 생긴다는, 평범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뻔할지도 모르는 잔잔한 소재는 이 영화를 관람하기 이전부터 관객으로부터 기대감을 한껏 낮추는 장치로 작용할 법하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력은 흠잡을 데 없었고, 그렇다고 하여 개연성이 아주 희박한 이야기로 억지 눈물을 짜내는 방식의 작품도 아니기에 썩 준수한 흡인력과 몰입도를 선보인다. 

 

 

아이들의 눈망울은 늘 한결 같다. 명환은 자신의 자녀를 죽게 한 범인의 자녀로부터 죽은 딸의 형상을 보기라도 한 걸까? 처음 만나게 되는 아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빡빡 깎은 머리를 모자로 감추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엉겨붙는 범인의 자녀인 은유(곽지혜)의 행동은 더욱 가슴 절절하게 다가온다. 마치 입양을 기다리던 동물이나 아이가 입양인의 간택을 받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잘 보이려 하는, 일종의 본능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이다. 오로지 범인을 잡기 위한 요량으로 은유의 가짜 아빠 역할을 자처한 명환은 이후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아마도 은유로부터 딸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 속에 담아둔 채 표현도 못하고 매번 뒷치닥거리만 하며 모든 열정을 한 여인에게만 오롯이 쏟아부은 태영, 비록 서정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는 않지만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흡족해한다.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그녀에게 누가 될까 봐 모든 걸 혼자서 감내하며 끝까지 그녀의 미래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던 그다. 이러한 캐릭터는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흔히 접해왔던 터라 낯설지는 않으나 개인적으로는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캐릭터 중 하나다. 오롯이 주기만 하는 그에게 서정이 무언가를 베풀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최강칠은 과거 자신의 과는 철저하게 숨기고 공은 실제보다 더욱 부풀려 떠벌리는 성격의 소유자다. 이는 통상 자신의 두려움 내지 나약함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 중 하나다. 그의 다소 과대포장된 삶은 홍종구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일부 꼴사나워하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그래도 주변인들 다수에 의해 그럭저럭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의 평상심을 무너뜨리게 한 건 자신에게는 과거 공포의 인자였던 홍종구가 등장하면서부터다. 공포감을 감추고자 하는 마음은 그와는 반대로 과격한 형태로 드러나기 일쑤다. 각기 살아온 삶은 결국 각자가 책임져야 할 인생임이 분명하지만, 삶의 갈림길에서 단 한 차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이든 실수로든 엉뚱한 방향으로 발을 딛게 만드는 순간, 전혀 다른 삶의 양태로 발현될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열이면 열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삶을 거치면서 겪게 될 희노애락은 모두가 엇비슷하다. 갈림길이 됐든 아니면 곧은 길이 됐든 이미 걸어온 길은 절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오로지 직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와중에 무수한 인연을 쌓아가고 또한 수많은 일들을 겪게 되며, 그때마다 적절한 표현이 요구되어지곤 한다. 실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지만 왠지 평소 표현하기가 가장 꺼려지게 하거나 어렵게 만들던 말이 다름아닌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아닐까? 

 

 

감독  전윤수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