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민주주의의 수난이 우뇌를 자극시킨다

새 날 2016. 2. 24.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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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한국이 올해 유엔 인권이사회 의장국이 됐다는 반가운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정부는 이를 두고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의 성과라며 자화자찬하기에 바쁜 모습이다. 하지만 국내 여론뿐 아니라 국제사회가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혀 그렇지가 못한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한국의 인권 상황은 사실상 악화일로에 놓여 있으며, 민주주의는 저만치 후퇴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6,70년대 냉전시대로 회귀하고 있노라는 비판마저 심심찮게 제기된다. 징후는 여러 곳을 통해 드러난다.

 

이에 대한 근거 제시에 앞서 국내 여론을 꺼내들 경우 객관적이지 못한 사례로 여겨질 수도 있기에 철저하게 언론에 보도된 국제사회의 평으로 이를 대신할까 한다. 국제 인권기구 연합체인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는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해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연속으로 등급 심사를 보류하며, 2004년 가입 이래 처음으로 A등급 밑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경고해 왔다. 이쯤되면 유엔 인권이사회 의장국으로서의 체면을 제대로 구기고 있는 셈이라 정부의 자화자찬이 머쓱해지지 않을 수 없다.

 

ⓒ뉴스토마토

 

미국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는 “비판세력에 대한 한국 정부의 위협이 증가했고, 정부가 온라인 등에서 이뤄지는 논의 및 비판을 주기적으로 감시 검열하고 있다. 한국에서 정치적 권리와 시민의 자유가 하향 추세에 있다”고 지적했다. 앰네스티 역시 지난해 초 연례보고서에서 집회 시위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등에 문제를 제기하며 박근혜 정부 들어서면서 인권이 후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독일 기독교계가 주독 한국대사에 보낸 서한은 더욱 뼈아프다. "한국에서 비판적 언론인들이 위협 당하고 있으며,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리가 제한되고 국가보안법이 남용되고 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등으로 한국사회에 걱정과 공포, 불안감이 확대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 안보를 핑계로 합법적으로 인권을 제한했던 냉전 시대로 회귀한 상황이다"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한국에 상주하며 우리 사회를 근접 거리에서 관찰해 온 외신기자들의 우리에 대한 시선 역시 따가움 일색이다. 한 언론 매체가 국외 언론 특파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박근혜정부 3년간 한국의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했다고 진단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지난 3년간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응답자의 84.4%가 "후퇴했다"고 답한 것이다. 84.4%의 수치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진보했다"는 응답이 전무한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함 그 자체다. 민주주의의 척도인 언론 자유도 역시 5점 만점에 고작 2.3점에 불과했다.   



지금 국회에서는 반세기만에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행위인 필리버스터가 행사되고 있다. 이와 함께 광화문에서 예정된 앰네스티의 색다른 시위 방식은 현재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퇴보를 거듭하며 조롱 당하는 상황에까지 처해 있음을 반증하는 잣대로 받아들여진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통한 '테러방지법'의 국회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해 야당은 47년만에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든 채 이틀째 밤샘 토론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필리버스터는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거나 의사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는 행위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합법적인 일종의 거부권 행사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테러방지법'은 사실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알다시피 국가안보라는 명제 앞에서는 어느 누가 됐든 가치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로 해당 법은 김대중정부 시절 발의된 바 있으나 여당과 야당 너 나 할 것 없이 저마다의 처지가 바뀔 때마다 전혀 상이한 입장을 취하는 바람에 그동안 공전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현재의 가장 큰 난관은 지난 대선 당시 선거 개입으로 물의를 일으킨 국정원에 대한 불신이다. 이를 불식시킬 수 있는 장치가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북관계의 악화를 빌미로 국정원에 힘을 실어주는 건 결국 고양이에 생선을 맡기는 결과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게 중론이다. 앞서 언급한 국제사회가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러한 여론에 힘을 실어준다. 

 

안보라는 명분 하에 자칫 인권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마저 우려되는 테러방지법의 치명적인 문제점에 대해 야당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대중들에게 조목조목 알리며 여론을 모을 수 있고, 야당의 존재감마저 부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 있으며,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든 채 다수당의 횡포를 일삼고 있는 여당을 상대로는 독소조항에 대한 협상력마저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이점이 존재한다. 최악의 경우 혹여 필리버스터가 도중에 중단되어 결국 해당 법이 본회의 의결 처리된다 해도 야당의 입장에서는 실보다 득이 더 많다. 많은 시민들이 무언가 창의적인 데다 신선한 느낌마저 드는 필리버스터를 바라보며 야당에 힘을 실어주거나 응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겨레

 

한편, 국제인권운동단체인 앰네스티는 지난해부터 한국의 집회 시위 문화에 대한 모니터링을 펼친 결과 경찰의 강압성과 폭력성이 도를 넘어선 것으로 판단, 청와대 부근에서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내용의 집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집회 신고 이틀만에 경찰이 불허 결정을 내렸단다.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그에 대한 항의 차원으로 기존 집회와는 달리 실제 사람이 아닌 ‘홀로그램’을 시위에 활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3D 홀로그램을 활용한 이른바 '유령집회'는 24일 오후 8시30분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30분간 진행될 예정이다.

 

ⓒ헤럴드경제

 

목마른 사람이 결국 우물을 파기 마련이듯, 민주주의의 수난은 우리의 잠자던 우뇌를 자극시킨다. 필리버스터를 통한 극적인 상황 연출과 창의력 가득한 새로운 시위 방식은 이의 결과물로 읽힌다. 경찰은 유령집회를 두고 어떻게 규정하고 처리할지 고심 중이라는 언론보도가 잇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홀로그램을 통해 사전에 촬영한 영상을 투영하면 1000여 명이 모여 집회를 진행하는 것과 동일한 시각적 효과를 누릴 수 있으나, 실제로는 사람이 직접 참여하는 게 아닌 가상의 영상에 불과하기에 과연 이를 집회의 성격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 등, 기존의 틀을 벗어난 집회 방식에 경찰은 내심 당황해 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지금 인터넷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 등이 몇 시간동안 필리버스터를 이어가고 있으며, 신기록을 갱신했다는 등의 이야기로 온통 뜨겁다. 일단 대중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처럼 야권이 힘을 받는 모양새라 다행스러운 일이다. 역시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어느덧 대한민국은 인권 후퇴와 민주주의의 조롱이 만연한 사회로 급속하게 변모해 가고 있으나, 그의 반대급부로 우리들의 우뇌를 자극시키며 진정한 의미로서의 창조경제의 기운을 발현케끔 하고 있다. 어쨌거나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만이 민주주의의 퇴보를 멈추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은 자명하다. 모처럼 단합된 힘으로 야권을 응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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