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의 날선 설렘

호젓한 정동길, 둘이 걸어 더 좋아요

새 날 2016. 2. 12.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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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8도까지 수은주를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던 주범, 이른바 '북극 한파'가 물러가더니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겨울의 끝자락을 알리기라도 하는 비일까? 그런데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비 그치면 다시 한파가 예고돼 있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이 비는 예보상 토요일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양마저 제법 많다. 하긴 다른 지역은 모르겠으나 내가 사는 중부지방의 이 곳은 그동안 너무 가물긴 했다. 눈 다운 눈을 올 겨울 동안 단 한 차례도 구경을 못 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2월의 비 소식은 이번 겨울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신호탄임엔 틀림없다. 유난히 춥고 삭막하기만 했던 올 겨울, 떠나간다고 하여 아쉬움 따위가 남아 있을 리 만무하지만, 긴 설 연휴가 모두 끝나갈 즈음 왠지 내게 남아 있던 한 자락의 미련은 분명 연휴를 그냥 놓아주기가 너무도 섭섭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설 연휴 4일차 되는 날이다. 이번엔 어디로 향해 볼까? 그래, 정동길은 어떨까?

 

 

이날 기온은 영상 5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얄미운 누군가처럼 바람이란 녀석은 인정사정 없이 나의 얼굴을 할퀴더니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기 일쑤다. 뒤끝 작렬이다. 몹시도 매서웠다. 목도리가 생각날 정도다. 그래도 괜찮다. 콧바람을 들이키는 일만으로도 나의 잠자던 세포들이 일제히 곤두서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시청역에서 내리자마자 덕수궁 대한문을 지나 이른바 덕수궁길이라 불리는 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이곳은 대중가요를 비롯한 각종 콘텐츠 등에 흔히 등장할 만큼 매력적인 공간이다. 특히 낙엽이 떨어질 즈음이면 각종 문화 행사가 개최되는 등 세인들의 감성을 한껏 고조시킨다. 그렇다면 황량하기 짝이 없는 이 2월엔 어떨까?

 

 

주변은 온통 볼거리와 느낄거리로 가득하다. 계절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덕수궁이라는 멋드러진 옛 고궁부터 시작하여 역사적 상징물로 그득한 데다,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한 각종 전시관들이 빼곡한 까닭이다. 한 마디로 정동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공원이자 예술공간이라 칭해도 될 만큼 문화적 감성이 뚝뚝 묻어나오는 곳이다.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고궁의 담벼락만으로도 우리의 안구는 절로 즐거워진다.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정동길을 지날 때면 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진다. 고 이영훈이 곡을 쓰고 가수 이문세가 부른 노래 '광화문연가'속 주무대가 바로 이곳이니 말이다. 작곡가 고 이영훈씨를 기리는 형상물 뒤로는 그의 8주기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고, 그 앞에선 길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중명전, 을사늑약이 이뤄졌던 곳이다.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탓인지 고요한 분위기와 뒤섞여 왠지 서글픈 감정과 기운이 전해져 온다.

 

 

중명전 안에서 조용히 밖을 내다본다.

 

 

인사동에는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민영환의 자결터가 있다. 이 액자는 바로 민영환이 자결하기 전 메모지에 남겼던 유서를 한 서예가가 옮겨놓은 것이다.

 

 

정갈하면서도 무언가 정체 모를 슬픈 감정 따위가 배어 있는 곳이 바로 중명전이다.

 

 

옛 신아일보사 건물, 그 옆에 딸린 보조건물에서 영업 중인 카페가 이채롭다.

 

 

낙엽을 밟지 않으면 또 어떤가. 정동길은 그 자체로 운치 있거늘..

 

 

앞서 언급한 이문세의 노래 가사속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은 다름아닌 '정동제일교회'다. 1898년에 준공되었다고 하니 1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이겨냈다. 하지만 노래에서처럼 결코 조그만 교회당은 아닌 것 같다. 그 규모가 상당하다.

 

 

 

꽤나 유명한 교회인데, 다른 무엇보다 3.1 독립운동 당시 인사동에 위치한 승동교회처럼 이 교회에 소속된 학생들 역시 3.1운동에 깊숙이 관여하였다고 하니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정동길은 한 시간이면 한 바퀴를 천천히 돌고도 남을 만큼 결코 길지 않은 호젓한 코스다. 혼자 걸어도 좋고, 둘이 걸어도 좋다. 특별한 목적 따위가 없어도 좋다. 인사동이나 북촌처럼 관광객들로 넘쳐나지 않아 떠밀려 다닐 염려도 적다. 걸어다니다가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미술관 등에 잠시 들러 잠자던 촉과 영감을 불러오는 일도 가능하다. 

 

눈을 당췌 구경할 수 없는 겨울철이지만, 오히려 비가 내린다, 아무려면 어떠한가. 정동길은 언제 와도 왠지 나를 반겨줄 것만 같고, 모든 것들이 낯익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데다,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만끽할 수 있는 멋진 곳이다. 이 삭막한 겨울이 다 가기 전 정동길 한 번 걸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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