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우리사회,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들었나

새 날 2015. 6. 29.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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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난 지 올해로 20년째다.  아마도 그 무렵이 아닐까 싶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회 전반엔 긍정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뚜렷했던 것 같다.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밝은 사람은 환영 일색이었고, 반대로 부정적인 사고를 지닌 어두운 사람은 사회의 낙오자로 낙인이 찍히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일조차 사치로 받아들여지거나 심지어 아플 수 있는 여유마저 허락되지 않던 시기가 꽤 오랫동안 지속됐던 것 같다. 

 

오로지 긍정만이 성공의 지름길이자 이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조건이라며, 사회 요소요소 갖은 채널을 통해 주술을 불어넣기 바빴던 시기다.  낙오하거나 실패한 이들에게는 이러한 일을 게을리한 대가로 받아들여질 뿐, 그 어떠한 변명의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실패의 책임은 온전히 개인 탓이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참사는 아마도 이러한 주술적 효험이 바닥을 드러낸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분위기는 반전된다.  긍정 이데올로기를 억지 주입해 가며 경제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개인은 도구 및 수단으로 전락해야 했고, 성장 과실인 화려함 일색의 이면엔 상처받은 사람들이 넘쳐났던 탓이다.  이렇듯 긍정 이데올로기의 강요는 시장경제의 잔인한 속성만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만들 뿐, 시간이 갈수록 개인들을 지치게 하며 점차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대략 2,3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삭막한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탓인지 갑자기 지친 현대인들에게 힐링이 필요하다며 누구랄 것도 없이 모든 매체를 통해 마음의 치유가 권장되기 시작했다.  마치 고단한 현대인들의 삶을 일일이 어루만져 주기라도 할 듯 힐링 마케팅이 대세로 떠오르던 시기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유행어도 이즈음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고단한 삶을 이루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은 무엇 하나 바뀐 게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형식적인 치유 행위만으로 지친 사람들의 삶의 기력을 원복시킨다는 건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 일일 테다.

 

그로부터 또 다시 얼마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무한경쟁과 속도전 속으로 내몰려진 우리의 삶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삶의 질은 형편없어졌고 미래마저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특히 향후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할 청년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건네는 위로의 말조차 청년들에겐 가식이자 궤변으로만 들려올 뿐이다.  오죽하면 부모뻘 세대를 그토록 원망했을까 싶다.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먹고 살기 힘들다며 아우성이다.  그나마 가까운 미래로부터 희망이라는 녀석을 엿볼 수 있다면, 현재의 희생쯤 달게 감내할 텐데, 이젠 그마저도 도통 찾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부모세대는 부모세대대로 자식세대는 또 그들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고통스런 나날의 연속이다.  특히 앞서도 언급했듯 젊은이들에게 짐 지워진 무게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가혹하기 짝이 없다.  삼포세대는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이고, 근래엔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그리고 심지어 인간관계마저 포기해야 하는 오포세대가 대세를 이룬다.  이들은 장기불황과 취업난에 허덕이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 주기는커녕 국가가 존재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이유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마저 지켜주지 않고 있으니 이젠 기댈 언덕이 전무한 상태다.

 

생활비와 학비에 치인 대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이를 마련하느라 캠퍼스의 낭만 따위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우여곡절 끝에 학업을 마쳐도 융자받은 수천만원의 학자금 빚을 떠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현실은 그저 암울할 따름이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거나 스펙이 아주 뛰어나지 않은 이상 대다수의 대학 졸업생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비정규직을 전전하거나 그도 여의치 않을 경우 아르바이트로 사회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에겐 학자금 빚 갚는 일부터 큰 짐으로 다가오는 터라 연애와 결혼 등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다.

 

 

각자도생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제각기 살아갈 방법을 도모한다는 의미인데, 메르스 사태 국면에서 널리 회자된 용어다.  세월호 참사를 지나 메르스에 접어들면서 무능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정부와 정치권의 행태를 몸소 접한 대중들은 결국 각자도생만이 살 길이라는 명제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체득하게 된다.  바야흐로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거나 부모가 자식에게 무조건 퍼주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미흡한 노후 복지 정책 탓에 자신의 노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부모세대에게 있어 자식 양육은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식세대 역시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힘겨운 데다 자신의 노후 준비를 위해서라도 부모 봉양은 언감생심이다.  먹고 살기 어려워 각박해진 세상 때문에 다른 세대를 탓하며 서로를 원망하는 일은 이제 일상다반사다.  자식세대는 자신들이 현재 처한 어려움을 부모세대의 탓으로 돌리며, 부모 자식 간 끈끈했던 관계마저도 팍팍한 현실 앞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각자도생의 삶을 꾸리게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를 거치며 우린 너무도 절실히 깨달은 사실 하나가 있다.  적어도 개인의 생명과 안전만큼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권은 자신들의 이권에만 눈이 멀어 계파 간 싸움이나 할 줄 알았지 절대로 국민들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다.  행정부 수장은 유체이탈 화법을 통해 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다 보니 정부 역시 더 이상 무능할래야 무능할 수 없을 정도로 무책임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대중들 사이에선 차라리 무정부가 나으리라는 회의감마저 급속도로 퍼진 상황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미국행 취업이민자 수가 지난해 5945명으로 9년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고국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는 뉴스는 이제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다.  오죽하면 한국을 떠나려 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 역시 기회가 닿을 경우 아마도 그들과 비슷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부러움 반 미련 반이 섞인 탓이다.  어쨌거나 한국을 떠나기 위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이민계를 만들어 구체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이민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보도가 최근 잇따르던 찰나인데, 이를 구체적인 수치로 입증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싶다. 

 

이는 우리나라에 대한 젊은이들의 회의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삶의 질을 보장해 주지 못하니 미련없이 떠나고 있는 셈이며, 결국 각자가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각자도생의 방식이 최선의 선택임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어느덧 우리 사회, 긍정 강요의 시대, 참살이 그리고 치유의 시대를 지나 본격 각자도생의 시대로 진입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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