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화마에 맞선 소방관에게 '가짜 방화복'이 웬 말인가

새 날 2015. 2.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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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공무원은 3만8587명(2013년 기준)에 이르며, 소방관 한 명이 담당하고 있는 국민의 수는 1320명을 넘어선다.  799명인 이웃국가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912명인 미국과 비교해도 크게 웃도는 수치이다(국회 안행위 소속 박남춘 의원 국정감사 자료). 

 

ⓒ세계일보

 

주당 근무 시간은 56시간에서 84시간에 이르며, 최근 5년 동안 순직한 소방관만 해도 30여 명에 달한다.  유해화학 보호장비인 화학 보호복의 구비율은 30%에 불과하며, 화생방 마스크와 제독제 구비율은 21%에 그치고 있다.  소방관 개인 안전장비는 태부족이며 그나마도 갖춰진 장비의 16.5%는 노후된 데다, 소방차 역시 20%가 노후 차량이다.  

 

재정 상태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지자체의 경우 장비 부족 때문에 사비를 들여 장갑을 구입해야 하거나 이도 여의치 않을 땐 심지어 농업용 고무장갑을 낀 채 화재 진압에 나서야 할 만큼 여건은 형편없다.  이런 상황에서 소방관의 직업 만족도가 바닥권을 헤매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수순 아닐까 싶다.  직업인으로서 영웅대접을 받거나 동경의 대상이 된다는 미국 소방관들은 그저 다른 세상 얘기로만 들려올 뿐이다.



소방관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처우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거니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얘기가 아니다.  그동안 꾸준히 제기돼 왔던 사안이며, 그 중 소방공무원의 '국가직 전환'은 여야 정치인들이 15년 이상 우려 먹을 만큼 단골 이슈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때 뿐이었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사고가 터질 때에만 반짝 이슈가 되고 곧 묻혀버려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근자엔 대통령도 소방관들의 처우 개선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모양새다.  지난해 11월 7일 소방의 날 행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소방의 가장 큰 자산은 유능한 소방관이다.  부족한 인력의 증원과 처우개선, 소방장비 예산 지원 등 소방관 여러분이 현재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부분을 집중적으로 개선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안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한층 높아진 상황에서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여론의 향방이 최근 소방관들의 근무환경과 처우 쪽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분히 의식한 행보로 읽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발언은 또 다시 말뿐이었던 셈이다. 

 

ⓒ머니위크

 

15일 성능검사도 받지 않은 엉터리 특수 방화복 수천여벌이 전국 소방서에 대량으로 보급됐다는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이에 따르면 관리 감독에 책임이 있는 국민안전처는 해당 제보가 들어올 때까지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실태 조사를 벌이는 등 늑장대응으로 일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수 방화복은 400도 이상의 고열을 견뎌야 하는 등 매우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이는 한국소방산업기술원(KFI)의 제품검사를 거쳐 정부에 납품되는 방식이다.  이번 건은 이러한 품질검사를 통과하지도 않은 가짜 방화복이 대량 유통된 경우이다.  일선 소방서로부터 품질검사를 받지 않았다는 제보가 조달청에 접수됨에 따라 국민안전처는 뒤늦게 이를 확인하고 해당 업체가 납품한 불량 방화복 전체에 대해 착용하지 말 것을 일선 소방관서에 통보하였으며, 긴급 예산을 투입해 새로운 방화복을 서둘러 구매키로 했단다. 

 

결국 소방관들은 수개월 동안 안전성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가짜 방화복에 자신의 목숨을 맡긴 채 화재 현장에 출동했던 셈이며, 이를 관리해야 할 국민안전처는 제보가 들어올 때까지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고스란히 방치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소방관에게 지급된 불량 방화복은 마치 경호원이 방탄복 착용 없이 요인 경호에 나선 경우와 같거나 군인이 군용 헬멧 없이 전투에 나선 상황과 진배없잖은가.  한 마디로 목숨을 내놓은 채 현장에 투입됐다는 의미가 된다.

 

목숨을 담보로 화마와 맞서 싸우는 소방관들에게 있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최후의 보루이자 생명줄과도 같은 아이템이 다름아닌 방화복일 테다.  그런데 검증도 안 된 가짜 방화복이 도대체 웬 말인가.  소방공무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은커녕 이젠 화재 현장에서 가장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생명줄마저 제발 끊지 말아달라고 하소연해야 할 정도로 그들을 극한 상황으로 내몰 셈인가. 

 

소방관들의 생명과 안전도 책임지지 못하는 부처가 도대체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안전을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건가?  이쯤되면 소방관들을 사지로 내몬 국민안전처는 단순한 직무 방기가 아닌 일종의 살인 방조 행위를 저지른 셈이 아닌가.  아울러 박 대통령이 약속한 소방관 처우 개선은 모두 어찌된 건가.  약속한 지 불과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마저도 다른 공약이나 약속들처럼 모두 공염불로 만들 셈인가. 

 

해당 제품을 납품하여 소방관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업체와 이를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은 채 일선 소방서에 해당 제품을 공급하게 한 뒤 뒤늦게 논란이 일자 이를 개선하겠다며 부랴부랴 나선 국민안전처 모두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  지난해 세월호를 비롯한 대형 참사를 수차례 겪으며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입이 닳도록 다짐해 왔던 우리 아니었던가.  결국 소방관들의 근무 여건과 처우의 질이 국민의 생명 및 안전과 직결됨은 물론이거니와 '안전한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다는 사실을 정부는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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