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억 건이 넘는 금융 개인정보가 유출된 초유의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은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듯 혼란스럽기만 하다. 매번 반복되어오고 있지만 뚜렷한 해결이나 예방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금융당국과 금융기관들 때문에 국민들은 몹시 뿔이 났고, 성난 분노가 들불처럼 번지더니 그 파장이 여느 때와 달리 집단소송과 같은 대규모의 집단 행동으로까지 옮겨붙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본질을 꿰뚫지 못해 갈피를 못 잡고 여전히 허둥지둥대고 있는 금융당국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올라올 지경이다.
금융회사 고객정보 유출 재발 방지 대책 발표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정부와 금융당국이 22일 '금융회사 고객정보 유출 재발 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개인정보가 유출되어도 특별한 제재가 없었던 금융기관에 대한 징벌적 과징금 부과, 개인정보 관련 책임자 및 유출자에 대한 행정제재, 과도한 개인정보 요구 금지, 개인정보 보유기간 제한, 금융회사의 비금융거래 업체에 대한 개인정보 공유 금지 등 대체로 이제껏 알려져 왔던 미비점에 대한 보완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전혀 새로울 건 없었고, 다만 보다 구체적인 안들이 제시되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한국일보
물론 특단의 대책이 나오리란 기대 따위 애초부터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손쳐도 이번 정부의 발표는 솔직히 기대 이하다. 아니 크게 실망이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정부와 금융당국의 근시안적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즉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중차대한 사태에 대한 관점을 정보 유출을 당한 국민들의 입장에서 헤아리려 하기보다는 오롯이 자신들과 금융기관의 입장에서만 초점을 맞춘 듯 보인다.
이와 같은 시각은 금융당국이 개인정보 유출 관련 필수 점검 사항 10가지를 발표하면서 유출 정보가 전량 회수됐고, 시중에 유통되지 않았으니 국민들은 전혀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을 통해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이제껏의 수사 결과 2차 피해가 전혀 발생치 않았으며, 해당 개인정보가 담겨진 USB를 회수했고, 최초 유포자와 이를 구입한 1차 판매자 모두 검거했으니 유출로 인한 추가 피해는 절대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하며 나선 것이다.
불안해하지 말라는 금융당국의 발언이 오히려 불안한 이유
결론적으로 유출된 정보가 이미 회수돼 고객의 피해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기존카드를 그대로 사용해도 된단다.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내놓은 정부 당국의 발언치고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다. 안심을 빙자한 논리적 근거도 영 허술하고 빈약하기 그지 없다.
지금 당장 2차 피해가 없고, 유출된 데이터들을 전량 회수 조치하였다고 하여 어떻게 차후에 발생할지도 모를 잠재적이거나 파생 피해마저 전혀 없을 것이라고 예단하며 큰 소리칠 수 있는 것일까. 이게 과연 정부가 할 수 있는 말일까? 아니 오히려 0.1%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에 대한 피해 예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하는 게 정상적인 정부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디지털의 장점은 무한 복제와 재가공을 통해 얼마든 다른 형태로의 변형이 가능하다는 점일 테다. 이미 유출됐던 데이터들이 설령 전량 회수되었다고 하여, 그리고 지금 당장 악용의 흔적이 없다고 하여, 가까운 장래에도 여전히 그럴 것이라며 100%를 장담하는 행위, 때문에 매우 위험천만하기 그지 없다. IT 강국에서 나올 법한 발언은 결코 아니다.
혹여 차후에 디지털화된 유출 데이터들이 다른 형태로 변형되거나 재가공되어 악용될 경우 원본 데이터와 형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번 유출본이 그 출처가 아니라고 우기기라도 할 셈인가? 현재로선 피해가 없다손쳐도 가까운 장래 또는 그보다 오랜 후에라도 이로 인한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피해가 나타나게 된다면, 그땐 또 뭐라고 할 텐가?
정부는 만에 하나 이번 정보유출로 인한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전액 보상해 줄 테니 역시나 염려 말라며 종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앞서 추가 피해가 더 이상 없을 테니 불안해하지 말라는 발언과 전면 배치된다. 아울러 이 사항은 새삼스럽지가 않다. 어차피 보상을 받으려면 피해 입증을 피해자 당사자가 해야 하며, 따라서 그에 소요되는 시간과 정력의 낭비가 이만 저만이 아닐 테니 말이다. 사후약방문이 따로 없는 격이다.
국민들의 불안한 마음과 폭발한 분노를 가라앉히고, 피해자의 상처난 마음을 보듬기 위한 직간접적인 대안은 하나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관리 체제에만 모든 대책의 방점을 찍고 있다. 그나마 발표된 대책들은 금융기관들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당정 협의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법률 개정과 연관되어 있어 단시간 내에 해결될 사안들이 결코 아니다. 아울러 정부 발표안 대로 통과되리란 보장 또한 전혀 없다. 언제나 그렇듯 정작 실제 대책이 발표될 땐 원안에서 대폭 후퇴한 누더기 정책들이 될 공산이 크다. 결국 국민들의 폭발할 듯한 분노를 잠시 회피하고자 하는, 임시 미봉책의 용도로 전락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의미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소비자의 마음을 진정 제대로 헤아렸다면, 오히려 피해 입증을 간소화하거나 피해 보상에 걸리는 기간을 대폭 단축시키는, 그리고 까다로운 집단 소송 참여 방법을 쉽게 터주는 등의 소비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는 게 보다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때문에 언제나 선제적 대응과 같은 예방조치 없이, 일이 터진 뒤에도 근본적인 대책 마련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아울러 소비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 따위 없이, 그저 불안해 하지 말라는 발언만을 되뇌이는 정부의 태도가 오히려 국민들을 더욱 불안에 빠뜨리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넘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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