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멘붕이라.. 87년 대선을 기억하는가

새 날 2012. 12. 2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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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대오, 지지율 상승 추세, 높은 투표율... 분위기는 확실히 좋았다. 난 승리가 목전에 와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도 뜨악하여 내 눈과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비단 나만이 그랬을까.. 지난 17대 대선 때 이미 실패를 경험했고, 학습효과를 기대하며, 모두들 비슷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란 나름의 확신을 가졌음이 사실일 게다.

 

집단 상실감에 빠져 들었다. 시쳇말로 표현하면 집단 멘붕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그에 비례한 충격은 더욱 크게 와 닿는 법이다. 지난 1987년 12월의 대선이 오버랩된다. 서울대생 박종철씨의 고문 치사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라, 민주진영의 반발이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던 상황, 기름을 끼얹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호헌조치.. 이는 결국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시민과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며, 한 목소리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게 한다.

 

87년의 6월은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거리의 아스팔트는 최루탄 파편과 가루로 덮여 온통 희뿌얬다. 가뜩이나 뜨거운 도심은, 공기를 가득 메운 최루가스로 인해 숨쉬기조차 힘에 겨웠다. 그러던 중.. 6월 29일, 민정당(새누리당의 전신) 대표 노태우씨의 민주화선언이 발표된다. 선언 내용 중 가장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로의 헌법 개정이었다. 민주 진영은 일제히 환호한다. 흡사 독재정치의 망령이 모두 물러가기라도 한 양...



노태우씨의 6.29선언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그해 12월 치러진 대한민국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 민주진영의 후보 단일화 실패에 따른 분열은, 노태우를 대통령에 당선시켜 주는 결과를 낳는다. 생각해 보라, 피땀 흘려가며 어렵게 쟁취해 낸 직선제, 하지만 국민들은 다시금 독재정권에 손을 들어 주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를... '죽 쑤어 개 준다' 라는 말보다 적확한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당시 민주진영이 겪었을 상실감이 어디 이번 선거에 비할 바랴. 특히나 당시 누구보다 강한 변화를 열망했던 젊은이들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실감과 절망감은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벗어나게 된다.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 보건대, 오히려 이렇듯 힘든 과정을 거칠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괴로움과 좌절감을 무작정 참으란 얘기는 아니다.

 

젊은이들이여, 밀려오는 상실감에 눈물을 참을 수 없다면 차라리 마음껏 울어 버려라. 자책이나 원망, 절망, 두려움 따위는 방사능 폐기물과 함께 저 지하 콘크리트 속에 영원히 가두어 두라. 괴로움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술을 마셔라. 실컷 울고 술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울분이 모두 가시지 않는다면? 또 울어라. 다시 울어라..........

 

분명한 건, 우리는 87년의 그 엄청난 상실감도 잘 극복하여 지금에 와 있다는 것이며, 현재의 실패와 아픈 상처가 자양분이 되어 보다 강한 세력으로 거듭날 것이란 사실이다. 물론 약간의 시간은 필요하다. 누구보다 변화를 갈망해 왔을 젊은이들에겐, 무척이나 힘들며 고난으로 와 닿을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니, 젊은이들이여, 눈물은 참지 말고 차라리 쏟아내라... 그 눈물들이 모여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이룰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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