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당신을 위해 자리를 비워둔 게 아닙니다

새 날 2017. 11. 21. 19:22
반응형

전철을 타고 가면서 아주 간단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호기심 때문이다. 비워놓은 임산부 배려석이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 유지되는가가 궁금하던 터였다. 일부러 임산부 배려석 바로 옆자리에 서서 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임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한 아주머니가 이게 웬 떡이냐는 듯 주저없이 자리에 앉는다. 혹시나 하고 반대편 임산부석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번엔 젊은 남성이 앉은 채 휴대폰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애초부터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으나 역시나였다. 


내가, 혹은 누군가가 이 자리를 비워둔 건 임산부가 느낄 수 있는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주고 좌석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함이지, 절대로 당신들 때문이 아니다. 분홍색으로 눈에 띄게 꾸며 누가 보아도 임산부 배려석임을 알 수 있도록 장치해놓았음에도, 아울러 전철 역내 방송을 통해 끊임없이 관련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곳에 떡하니 앉아 수다를 떨거나 게임을 즐기는 건 민폐이자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이지 결코 떳떳한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지난 15일 포항에서 규모 5.4의 강진이 발생했다. 정부는 학생들의 안전을 고려, 대학수학능력평가를 일주일 뒤로 연기하는 초유의 조치를 단행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다수의 수험생과 시민들은 당연하다며 수긍하고 호응하면서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진 발생 이후 포털 사이트의 포항 지진 관련 뉴스에는 포항 지역 주민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악성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리는 등 지역감정과 이기주의에 기댄 악의적인 행위가 만연하고 있었다. 대부분 포항 주민들 때문에 애꿎은 여타 수험생들이 피해를 보고 있노라는 취지의 글이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포항 지진으로 인한 해당 지역 주민들의 심리적인 불안감은 지난해 경주 지진 당시의 그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 드러났다. 비록 규모는 경주의 지진보다 작았으나 진앙지의 깊이가 얕아 체감할 수 있는 충격이 더 컸기 때문이란다. 현재도 포항 지역에는 여진이 지속되고 있고 피해가 갈수록 늘어나면서 주민들의 공포감과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는 양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왜 그들을 따듯하게 위로해주지 못하는 걸까? 


ⓒ노컷뉴스


치열한 무한 경쟁 속에서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일에만 익숙한 탓인지, 수능 연기가 이해 되지 않는다고 하거나 포항의 공부 못하는 애들 때문에 왜 자신들이 피해를 입어야 하는가 따위의 악성 댓글이 즐비하다. 이는 가뜩이나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을 포항 시민, 특히 수험생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포항 수험생들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든 그렇지 못하든 그와는 상관없이 자신들만 좋은 성적을 얻으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편협하고 이기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행동일 수 있다. 


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취해진 이번 수능 연기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대하기 어려웠던, 대한민국 사회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 상당히 긍정적인 조치로 평가된다. 경쟁 일변도 그리고 학벌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그보다 더 소중한 게 무언가를 여실히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게 해주었다.



모든 시험의 전제 조건은 공정성이다. 포항 지역의 수험생들은 당시의 공포와 불안으로 인해 온전한 컨디션일 리 만무하다. 수능 연기는 어려움에 처한 그들과 일반 수험생들 간의 형평성을 고려한 나름의 최선의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지변에 의한 재난을 핑계 삼아 밑도 끝도 없는 지역감정을 유발하고 극단의 이기주의를 표출하는 건, 흡사 임산부들의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 비워두기로 한 사회적 약속을 나몰라라 버려둔 채 멀쩡한 사람들이 얌체처럼 고작 게임이나 하기 위해, 혹은 수다를 떨기 위해 임산부 배려석에 떡하니 앉는 행위를 빼닮았다. 


당신을 위해 자리를 비워둔 게 아닙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