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경제적 격차에 의한 계층 간 갈등이 심각한 이유

새 날 2016. 3. 8.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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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 아파트라고 하여 다 같은 아파트가 아니다. 아파트 역시 급에 의해 그 수준이 정해진다. 거주 위치뿐 아니라 브랜드 이름만으로도 어느덧 주민들의 사는 수준을 판가름할 수 있는 세상이 돼버렸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자녀를 둔 예비 학부모들이 아파트 이름에 따라 사는 수준이나 급이 서로 다르니, 수준 낮은 집의 아이들과 자신의 자녀가 서로 섞이고 싶지 않다며 별도의 반을 만들어달라고 주장하는 현상은 어느덧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근래 '휴거'라는 용어가 초등학생 사이에 유행어가 되고 있단다. '휴거'란 원래 신이 재림할 때 구원받는 사람을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행위를 뜻하는 종교적 의미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도래를 앞두고 불안심리가 극대화됐던 지난 세기 말 즈음 이 '휴거'가 우리 사회를 한 차례 휩쓸며 문제시됐던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휴거'의 쓰임새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임대 아파트 브랜드인 '휴XXX + 거지'의 합성어로써, 임대아파트에 사는 또래 아이들을 일컫는 용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동심 가득해야 할 우리 아이들이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이를 지켜 봐야 하는 어른으로서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 사이에서 “너희 집은 몇 평이니?”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들이 오고 가는 건 비단 어제 오늘만의 얘기가 아닌 데다, 같은 아파트에 살더라도 친구 집의 평수보다 자신의 그것이 작을 경우 기를 펴지 못하는 아이들이 다수라고 하니, 임대아파트를 향한 아이들의 비틀어진 시각은 전혀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어른들의 끝모를 욕심이 어느덧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전이되고 있는 양상이다. 결국 아이들의 뒤틀린 시각은 어른들의 책임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최근 아파트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 때문에 화물 트럭을 보이지 않는 곳에 주차해 달라는 메모를 받았다는 한 차주의 하소연이 인터넷에 올라와 네티즌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해당 메모지에는 '차주님~ 입장 바꿔 생각해 주시고 화물차는 미관에 안 좋습니다. 103동 뒤편에 주차장 새로 만들어 놨으니 부탁드립니다. 101동 앞에는 주차하지 마세요. -입주민-'이라고 쓰여 있었다. 불법주차 등의 문제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며 받아들일 수도 있는 사안이나 그와는 전혀 상관 없이 오롯이 외관상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이동 주차해 달라는 한 입주민의 요청이었다.

 

해당 아파트의 주민 눈에는 화물차가 단순히 미관상 좋지 않게 다가올지 모르겠으나 이를 운행하는 차주와 그 가족의 입장에서는 삶의 애환과 땀, 노력 등이 오롯이 배어있는,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든든한 벗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모습에는 어른들의 현재가 고스란히 투영된다. 오늘날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변모하게 된 건, 화물차의 사례처럼 전적으로 어른들의 뒤틀린 시각 때문일 테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며 자존감을 세우려 하는 어른들의 천박함이 아이들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단순히 천박한 물질주의사회가 우리 아이들의 동심까지 멍들게 했노라며 장탄식만으로 그치기에는 사회 곳곳에서 발현되는 각종 징후가 자못 심각하다. 일부 개인에 의한 단순 일탈 행위라면 차라리 다행이겠으나, 근래 부의 쏠림 심화로 인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며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마저 심하게 왜곡되는 등, 갈등의 골을 키우고 있는 모양새가 상당한 수준의 구조적 모순임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조차 부를 기준 삼아 편가름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의 골은 짐짓 깊다. 돈의 가치가 여타의 것들을 모두 압도하는 세상이 만들어가는 이러한 갈등 구조는 이질적인 계층 간 서로가 상대방을 단죄하려 하는 등 자칫 커다란 사회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국민대통합위원회가 ‘한국형 사회갈등 실태 진단 보고서’를 통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경고는 그래서 귀담아 들을 만하다. 

 

"한국 사회의 상이한 집단 간에 존재하는 배타적 면모가 악화돼 서로를 혐오하는 상황으로 연결되는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혐오현상의 기저로 부모의 재산, 그리고 그와 관련한 교육 기회 등에 의한 계층 체계의 폐쇄성에 주목하게 된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계층 상승의 중요한 요인이었던 교육이 더 이상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이기에 다양한 종류의 갈등 출현은 필연이다.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도 다름아닌 이를 해소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한 갈등의 골은 해당 모순이 원천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상 그 깊이를 더해가는 특징을 보인다. 부익부빈익빈이라는 경제적 격차는 과거에도 있어 왔고, 인류가 존재하는 이상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처럼 격차가 나날이 벌어지고 있는 건, 발현 증상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따른 해결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의미한다. 계층 간 이동이 가능한 사다리의 부재 탓이다.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지적하고 나섰듯,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기반이자 유일한 희망이던 교육 또한 그의 대안이 되지 못하면서 기회의 폭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부모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가기 어려운 여건이고, 혹여 좋은 대학을 나온다 한들 마찬가지로 부모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계층 이동은 언감생심이기 때문이다.

 

기회의 단절은 제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절대로 상위 계층으로의 이동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는 갈등 구조를 키우고 상이한 계층 사이의 적대적 감정을 부풀리며 어느 순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다. 헬조선과 흙수저라는 자조 섞인 표현을 쏟아내놓고 있는 최근 청년들의 절망감 또한 이로부터 기인한다. 사회 구성원 간 편견적 시각이 고착화되고 암암리에 형성된 계층 사이의 위화감이 증폭되어가며, 어느덧 앞서 든 사례들처럼 우리의 일상에서마저 계층 간 갈등에 의한 잦은 충돌이 빚어지고 있는 양상은, 어쩌면 그 시한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전조 증상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갈등 구조를 심각하게 바라 봐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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