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의 전설

"그깟 북극 한파가 대수더냐, 난 말라뮤트다"

새 날 2016. 1. 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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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시원하게 잠을 이룬 날이다. 하지만 근래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묘한 분위기가 왠지 낯설다. 평소 같았으면 시끌벅적이었을 대문 밖 풍경은 온종일 조용하기만 하다.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극심한 적막감마저 감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한낱 개에 불과한 나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짚이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촉을 곤두세워 본다. 허구헌날 대문 앞에 나를 묶어놓은 채 옴짝달싹 못하게 했던 이집 식구들, 결과적으로는 고마운 일이나 며칠 전부터 뜬금없이 내 목줄을 풀어놓은 사실이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다.

 

바깥 기온은 최근 제법 선선해졌다. 주인님과 식구들 그리고 그외의 사람들은 이 정도의 기온에 매우 춥다고 바들바들 떨며 외출마저 자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하지만 말이다. 나로선 활동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날의 연속이다. 그래 맞다. 나를 풀어놓은 건 일종의 주인님 배려다. 내가 묶여 있으면 연일 계속되는 추위에 자칫 활동 부족으로 인해 무언가 사단이라도 벌어질까 봐 나름 배려한답시고 자유를 허락해준 셈이니 말이다.  

 

ⓒ연합뉴스

 

주변 환경은 생각보다 녹록지가 않은 모양이다. 전 지구적으로 난리 부르스인 걸 보아 하니 더욱 실감 나는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까지, 북반구를 강타한 최강 한파에 지구촌 곳곳이 온통 몸살을 앓고 있단다. 풋~ 우습다. 고작 이 정도의 기후 때문에 그토록 호들갑인가. 사람이란 동물은 툭하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며 호기롭게 치켜세우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정작 자연 앞에만 서면 이렇듯 우리보다 훨씬 초라하면서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기 일쑤 아닌가.

 

오늘 아침 내가 살고 있는 서식지의 기온은 영하 18도를 찍었다. 15년만의 한파라느니 어떻느니 하며 난리도 이런 난리는 없다. 물론 나로서도 이런 낮은 기온은 생애 처음으로 접해보는 기온이긴 하다. 숨을 내쉬는 일만으로도 금방 고드름이 맺힐 기세다. 사람들은 한 술 더 뜬다. 잠시만 밖에 서있어도 콧속이 얼어붙을 것 같다며 깨방정들이다. 하지만 난 사람들의 이런 반응이 재미있기만 하다.

 

어젯밤 북극 한파가 절정을 찍으며 한반도 상공을 지나는 사이 난 주인님 식구들이 무사히 잠들 수 있도록 현관문 앞을 밤새 지켰다. 못믿겠다고? 이래봬도 난 충견이다. 비록 중간중간 단잠에 빠진 채 잠꼬대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평소 나더러 충성심이 없느니 귀소 본능이 약하느니 하며 뒤에서 나의 흉을 보던 주인님 식구들을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 내게 의리 빼면 털가죽밖에 더 남겠는가.

 

 

하지만 주인님 식구들은 이런 나의 속도 모르는 듯 하는 꼴들이 영 밥맛인 데다 얼척없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그렇지, 아침이 되어 해가 중천에 떴는 데도 주인님 식구들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현관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있는 걸로 봐선 다들 잠자리로부터 벗어났음이 틀림없는 데도 말이다. 이런 쯧쯧.. 난 현관문 너머 집안의 동태를 살핀다. 물론 반사 유리 때문에 내 눈으로는 안쪽 상황을 전혀 감지할 수가 없다.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촉에 의지해야 할 처지이다. 현재 현관문 안쪽엔 외부와의 기온 차이로 인해 성에가 잔뜩 낀 상황이다. 밖의 기온이 장난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난 홀로 밖을 사수하고 있다.  



놀고 싶은 데다 심심해 죽겠는데, 아무도 나오지를 않는다. 순간 오기가 발동한다. 난 현관문을 지지대 삼아 벌떡 일어선다. 선 채로 현관문에 충격을 가한다. 안쪽에 있던 주인님 식구들이 이 소리를 듣고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님이 밖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이쯤되면 나의 행동이 효과를 발휘한 셈?

 

얼마나 칭칭 싸맸는지 주인님의 얼굴을 당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다. 그래도 왠지 걱정스러워 하는 눈치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영하 18도까지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냥 나를 밖에 홀로 풀어놓았으니 자신들의 연약한 신체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난 주인님의 걱정을 일시에 불식시키고자 평소와 다름없이 힘껏 일어선 채 앞발 두 개를 주인님의 손에 척 맡기고 격하게 반가움을 표시한다. 주인님 반가워요~

 

 

주인님 역시 이 추위에도 온전히 버텨낸 나를 보더니 평소보다 더욱 반가운 척을 한다.(내가 볼 땐 분명 반가운 척이 맞다) 뭐라고 말도 건넨다. 짐작컨대, '밤새 춥지는 않았니 미르야. 어라, 멀쩡하네?' 라고 하는 듯싶다.(물론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난 주인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언의 텔레파시를 보낸다. '주인님, 걱정마세요. 전 보다시피 멀쩡하잖아요. 제가 누군가요. 알래스카가 원산지인 말라뮤트잖아요. 이 정도의 추위쯤 끄떡없답니다. 자, 보세요. 떨지도 않죠?'(다른 건 몰라도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왠지 부족한 느낌이다. 무언가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이다. 그래서 난 주인님의 두 손을 벗어나 바로 시멘트 바닥에 드러눕는다. 주인님은 순간 '헉~' 하며 단발마를 내지른다. 왜 그랬을까? 나의 행동을 바라보는 주인님의 얼굴엔 놀라움 반 걱정 반이라는 적잖은 염려의 기색이 역력하다. 하긴 전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15년만의 강추위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여름도 아닌 북극 한파에 시멘트와 씨름이라니..

 

분명 그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주인님이 평소와는 달리 나를 꼭 껴안고서 한동안 놓아주질 않는다. 생존을 확인하고 상호 안녕을 기원하는 순간이다. 주인님의 심장 박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주인님도 분명 그러하겠지만, 나 또한 이 순간을 통해 내가 온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순간과 영혼이 교차하는 짧디 짧은 찰나, 우린 비로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에 서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각기 내쉰다. 휴~

 

 

난 주인님에게 다시 한 번 나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강인한 준족을 이용하여 마당 한 바퀴를 열심히 내달린다. 아니 두 바퀴, 세 바퀴.. 내 힘이 다할 때까지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린다.

 

그래, 이깟 북극 한파가 별 거냐, 난 말라뮤트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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