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사진 한 장의 위력 실감케 한 외신들

새 날 2015. 9. 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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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위력이 실로 대단하다는 건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근 미디어 매체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사례들은 이를 다시금 곱씹게 한다. 어제 포스팅에서도 언급했고, 그보다 앞서도 한 차례 언급했던 사안이긴 하지만, 그래서 아주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터키 해안으로 떠밀려온 시리아 꼬마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 사진 한 장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사진 한 장이 세계인들의 이목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있고, 슬픔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든 데 이어, 심각성을 더해가는 시리아 난민 사태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게 하는 도화선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과 며칠 전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으려던 트럭 안에서 70여명의 난민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나 그에 앞서 지중해를 건너던 배가 침몰하여 수백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외신을 접하면서도 실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리아 난민 사태를 그저 남의 일이겠거니 여기며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오던 터다. 어쩌면 꼬마 난민의 주검 사진 한 장이 이렇듯 큰 반향을 불러오게 된 이면엔, 물론 세살에 불과한 유아의 죽음 그 자체가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겠지만, 단순히 한 아기의 죽음 때문이라기보다 앞서 전해 들었던 끔찍한 비극들이 서사의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 사진을 바라보며, 세살 아기마저 죽어야 하는 이 지독히도 끔찍한 현실에 대해 비통한 심경을 드러내고 안타까움을 호소해오고 있는 데 반해, 또 다른 무리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사진이 거부감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굳이 이런 사진까지 신문 지면에 인쇄 후 배포해야 했느냐는 게 그들의 한결 같은 반응이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신문사를 향한 일부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단다. 하지만 독일의 대중지로 알려진 '빌트' 역시 이러한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으나 그들이 독자들의 항의에 대응했던 방식은 사뭇 달랐다.

 

8일자 신문을 발행하면서 사진이란 사진은 모조리 빼버린 것이다. 대신 1면 상단에 큼지막한 글씨로 '왜 빌트는 오늘 사진을 싣지 않았나'라는 편집국장 명의의 입장이 실렸다. 이쯤되면 독자들을 향한 도발로 여겨질 만하지 않은가. 아울러 편집국장은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도 남겼다.



이번 편집은 사진의 위력에 대한 헌사다. 사진이 없으면 세계는 더욱 무지해지며 약자는 길을 잃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사진은 어떤 문명도 단기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계속해서 지옥문을 열어젖히는 게 인간임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빌트지가 사진을 빼버린 이유는 사진의 위력을 몸소 체험해 보라는 일부 독자에 대한 무언의 저항 아닌 저항인 셈이 아닌가. 갑자기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다. 빌트사가 보여준 소신 있는 행동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 보니 어제 포스팅 소재로 삼았던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의 사례가 겹쳐지지 않을 수 없다. 르몽드가 꼬마 난민의 주검 사진을 1면에 실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세계인들과 감정을 공유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적어도 신문을 펼치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랬을 테다. 이를 받아든 독자들 역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신문사로서 손색이 없구나 하며 엄지 손가락을 척하고 세웠을 법하다. 직접 보시라.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신문 지면을 양 옆으로 펼치면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마지막면에 실린 명품 브랜드 구찌 광고 탓이다. 즉 신문을 펼치게 될 경우 1면과 마지막면이 나란히 놓이게 되는데, 각 면에 실린 사진이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1면과 마지막 광고면에 나란히 인쇄된 사진을 보게 되면 명품백을 든 모델이 마치 꼬마 난민이 떠밀려온 자세 그대로를 흉내내기라도 한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를 지적한 프랑스 사회학자의 언급대로 '고급스러운 놀라움'을 표현하려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정도다.

 

시리아 난민인 세살 꼬마 아기의 끔찍한 비극과 명품백 구찌를 손에 쥔 채 해변에 누워있는 여성 모델이 주는 그 기괴한 느낌은, 쿠르디의 주검 사진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었듯, 그야말로 사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의 위력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일부 독자들의 불만에 대해 아예 사진을 싣지 않은 채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낸 독일 빌트지의 사례는 이보다 훨씬 더 위력적으로 다가오지만 말이다.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뒤흔든 사례는 많다. 그 과정에서 보도 윤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독일 빌트지의 사례 역시 그로부터 비롯됐다. 비록 아기 주검 사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더러 있을 수 있으니 이를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보도해도 되는가 하는 따위의 지적이다. 독일 빌트지의 사진없는 신문 발행 행위는 이러한 일각의 지적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물론 여기서는 보도 윤리 문제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지 않을 셈이다. 다만, 쿠르디의 주검 사진 한 장이 과거 큰 반향을 일으켰던 몇몇의 사진들처럼 세상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아울러 때로는 같은 사안의 같은 사진이라 해도, 르몽드의 사례처럼 다른 요소가 더해져 본래의 의도를 퇴색시킬 바에야 차라리 빌트지가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것처럼 사진을 아예 넣지 않는 편집 방식이 훨씬 효과적이며 감동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초 사진이 있어야 할 자리가 온당히 채워져 있거나, 혹은 그 자리가 비워진 채라 해도, 어쨌거나 사진 그 자체가 지닌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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