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법치 무시, 원칙 저버린 광복절 특별사면

새 날 2015. 8. 14. 13:03
반응형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래 두 번째 사면이 이뤄졌다.  사면 대상은 모두 220만 6924명으로 역대 6번째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 중 초미의 관심을 모았던 경제인 사면은 14명에 그쳤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한화 김현중 전 부회장 등이 이번 대상에 포함됐으며, 애초 거론됐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 구자원 LIG그룹 회장 등은 이번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아울러 사회지도층에 대한 면죄부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정치인 또한 배제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서민생계형 사범과 중소 영세 상공인 등을 대거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국민 대통합과 국민 사기 진작이라는 특사 취지에 충실한 모양새를 갖췄다는 게 법무부의 설명이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의 브리핑에 따르면 부패 범죄와 강력 범죄,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사범 등은 이번 사면 대상에서 제외했고, 경제인의 경우 최근 형이 확정됐거나 추징금을 내지 않은 사람 등은 철저히 배제했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높은 선으로부터 특정인을 사면 대상에 포함시켜 달라며 전달되는 이른바 ‘쪽지사면’이 없는 유일한 사면이었다고도 한다. 

 

ⓒ뉴스1

 

정치인이나 공직자는 애시당초 배제된 데다, 경제 살리기를 표방했지만 주요 경제인의 사면 또한 최소화했으니, 나름 기준과 원칙을 충실히 지킨 것이라며 자평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더 나아가 과거 비정상적으로 이뤄지던 사면권 남용 관행을 정상화하고 국민이 용인할 수 있는 절제된 사면에 방점을 찍었단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번 815 특별사면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경제인의 사면 여부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달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국가발전과 국민대통합을 위해 광복절 특사를 검토하라"고 지시한 이래 재계는 기업인들이 이번 사면 대상에 포함되기를 기대하며 안팎으로 노력해 왔고, 새누리당 지도부 역시 적극 지원을 피력한 데 이어 대통령마저 긍정적인 검토 방침을 전하면서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에 기업인들이 대거 포함될 가능성이 점차 고조된 바 있다.  경제 살리기라는 화두가 이에 더욱 힘을 보태는 모양새였다.

 

때문에 최태원 회장 등 일부만 대상이 된 채 예상했던 경제인들이 포함되지 않은 건, 재계의 기대치엔 한참이나 미흡한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14명의 사면으로 생색내기가 일정 부분 가능했을 테고, 국민들의 기대에 대해서도 역시 기준과 원칙에 어느 정도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 됐든 혹은 경제인 모두가 됐든, 어쨌거나 수백억원의 자금 횡령 등 부정부패를 저질러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던 재벌 총수 일부를 사면 대상에 포함시킨 셈이니, 법무부의 자평처럼 과거정부에서 비정상적으로 이뤄져 왔던 사면권 남용 관행을 정상화했다는 표현은 지극히 부적절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면을 단행했다는 건 결국 원칙을 어긴 셈이니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친인척이나 특수관계인, 그리고 대기업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중대 범죄에 대한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할 것을 공약으로 내걸은 바 있다.  역대 정부의 사면권 남용을 강하게 비판하고, 당선자 신분이던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최측근 인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 특사에 대해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잘못된 관행을 확실하게 바로 잡아야 한다며 일침을 가했던 적도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사회지도층의 범죄에 대해선 더욱 엄정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며, 사회지도층 비리가 계속되는 한 국가에 대한 국민 불신은 지속될 것이기에 사면권 제한 원칙을 누누이 강조하고 또 강조해 왔다.  지난 4월 성완종 리스트 사건이 터졌을 당시에도 성 회장이 두 차례 특별사면 혜택을 받은 사실을 직접 겨냥하며 과거 정부의 도덕성을 성토한 바 있다.  그랬던 대통령이거늘, 비록 사면 최소화 카드를 꺼내들긴 했지만 어쨌든 이를 단행하였으니 결과적으로 볼 때 원칙과 신뢰를 저버린 셈이 된다.

 

대통령이 이번 경제인 사면을 단행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다름아닌 국민 대통합과 경제 살리기였다.  그런데 사실 이 대목도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오로지 경제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라며 경제인 일부를 포함하고 정치인들을 사면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사회 지도층에 대한 면죄부를 허용하지 않겠노라는 기본 원칙에 위배된다.  이 말인즉슨, 경제를 위해서라면 부패한 사회지도층에게 면죄부를 줘도 괜찮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치인은 안 되고 경제인은 되는, 이러한 어쭙잖은 논리는 결과적으로 볼 때 국민 대통합과도 배치되는 결과에 다름아니다.  더구나 재벌 총수들의 사면으로 일자리가 마구마구 창출된다거나 경기가 회복되어 이른바 경제 살리기로 직접 연결됐다는 근거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다.  즉 경제를 살리겠다며 재벌 총수의 사면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건 설득력이 약하다는 의미다.

 

ⓒ한겨레

 

결국 대통령은 이번 사면을 통해 그동안 입버릇처럼 떠들어 왔던 사면권 제한으로 법치를 바로 세우겠다는 원칙 따위는 모두 내팽개치고, 또 다시 부패한 짓을 일삼으며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법의 처벌을 받은 사회 지도층에게 돈과 권력만 있으면 언제든 과거 이력과 기록을 세탁해 주겠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국민들은 일제히 허탈감에 빠져드는 모양새다.  대통령의 약속 파기야 비단 어제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잘못된 관행을 확실하게 바로 잡겠노라는 대통령의 일성이 그 어느 때보다 황망하기 짝이 없게 다가오는 탓이다. 

 

대통령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불과 일주일 전에 14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무리수까지 둬 가며 국민들의 감정을 다독이려는 행동을 취했지만, - 실제로 이후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놀라운 효험을 발휘한 바 있다 - 누누이 강조하며 금과옥조로 여겨 오던 원칙을 경제인 사면을 통해 하루아침에 저버린 셈이기에 국민들의 감정은 오히려 악화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권과 정부 등이 이번 사면을 두고 자화자찬하는 모습을 보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