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이희호 여사 방북과 북한 표준시 변경

새 날 2015. 8. 1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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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색 국면이 길어지면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의 유일한 돌파구로 기대를 모았던 이희호 여사의 나흘간 방북 일정이 지난 8일 귀국으로 모두 마무리됐다.  그러나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의 면담이 불발되면서 별 다른 성과를 얻지 못 했던 것으로 전해져 그 어느 때보다 아쉬움은 크다.  더구나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김정은의 친서마저 없었다는 사실은 앞으로 전개될 남북관계가 더욱 험난한 방향으로 접어들 것임을 시사하는 터라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지난해 12월말 이 여사에게 친서를 보내 "다음해 좋은 계절에 꼭 평양을 방문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라"고 초청의 뜻을 밝히며 이번 방북이 성사됐다.  북한은 이희호 여사의 방북 기간 동안 특별손님으로 대우했노라 밝히고 있다.  하지만 3박 4일간의 방북 기간동안 이희호 여사를 맞이한 북측 최고인사는 노동당 부부장급인 맹경일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었으며, 김 위원장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초대해놓고 모습조차 비치지 않은 건 남과 북의 냉랭한 관계를 떠나 어쨌든 상당한 결례라 판단된다.  전 NBA 농구스타 데니스 로드먼의 초청에 대한 환대와 비교하자면 더욱 그렇다.

 

ⓒ한겨레

 

물론 북한의 이러한 태도가, 애초 우리 정부의 옹졸함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노릇이다.  정부는 이희호 여사의 방북을 앞두고 “정부 차원의 메시지는 없을 것”이라는 점과 함께 철저하게 민간 차원에서 이뤄지는 방북임을 재차 강조함으로써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지며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던 김대중 대통령 부인이라는 정치적 상징성과 위상을 애써 활용하지 않으려는 속내를 내비친 탓이다. 

 

한겨레 신문의 단독보도에 따르면 정부가 방북 당일에 이 여사를 메신저로 활용하지 않은 채 북한에 전통문을 보내, 별도 대북 제안에 나선 정황이 밝혀졌다.  이는 과거 정부를 상징하는 이 여사에게 남북관계 개선의 공과 스포트라이트를 돌리지 않으려는 불필요한 경쟁심에서 비롯된 무리수일 것이라는 한겨레 신문의 지적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정부가 지나칠 정도의 경직성을 드러냄으로써 일을 그르친 셈이 돼버렸다. 

 

ⓒSBS 방송화면 캡쳐

 

한편 북한은 오는 광복절부터 표준시간을 30분 늦추는, 이른바 '평양시간'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일부 국가에서는 독재자의 권력 과시용이라는 등 일제히 비아냥을 쏟아내고 있지만, - 물론 미국 등 서방의 관점이라 그다지 객관적이지는 않다 - 우린 이들과 맞장구치며 손가락질할 만한 처지가 못 된다.  왜냐하면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 두 개의 물리적인 공간으로 나뉘어진 데 이어, 이젠 시간마저 본격 둘로 쪼개지는 끔찍한 상황과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산하의 가운데가 주변 열강들에 의해 휴전선으로 그어진 채 각기 다른 공간에서 따로 살고 있으면서도 우린 늘 한 공기를 들이쉬며 같은 시간 속을 사는, 한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믿으며 강한 결속력이 암암리에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젠 공간에 이어 시간마저도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게 된 셈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모르겠다.  남과 북이 어느덧 철저히 다른 나라가 된 채 갈수록 커져가는 이질감에 가속도를 붙이는 모양새가 아닌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이희호 여사의 빈손 귀국은 남과 북 모두에 결코 이롭지 않은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속 좁기로 따지자면 우리나 북한이나 매 한가지라 여겨지는 상황인 탓이다.  이쯤되면 서로가 진지하게 관계 개선을 바라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저 권력 유지를 위해 양측이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적잖이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민족의 미래와 공존이라는 절체절명의 엄중한 과제 앞에서 양측 권력이 서로 어쭙잖은 자존심 경쟁을 펼치고 있는 정황은, 우리 민족 모두에겐 재앙으로 다가온다. 

 

이제 남북관계 개선을 기대할 수 있는 이벤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6.15 남북 공동행사에 이어 이 여사의 빈손 귀국으로 8.15 공동행사 역시 사실상 무산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북한은 지난달 개최됐던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이어 오는 10월에 열릴 경북 문경 세계군인체육대회마저 불참을 선언했다.  때문에 정부나 민간 차원을 떠나 남북관계 개선의 마지막 이벤트가 다름아닌 이희호 여사의 방북이었기에 결과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를 틀 만한 재료들은 그 수명이 모두 다한 셈이다.  이달 중순부터 한미 군사훈련인 을지훈련이 시작되는 등 이젠 악재만 켜켜이 남아 있다.  임기가 불과 2년여밖에 남지 않은 이번 정부에 남북관계의 진전을 바란다는 건 아무래도 헛된 욕망이 아닐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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