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해피 홀리데이> 아이들 눈에 비친 어른 세상

새 날 2015. 5. 1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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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의 모습은 온통 엉망이다.  거짓말장이에다 욕쟁이 그리고 심지어 싸움꾼일 때도 있다.  적어도 이 영화속 아이들의 눈에 어른거리고 있는 어른의 모습은 분명 그러하다.  세 남매를 키우는 더그(데이빗 테넌트)와 아비(로자먼드 파이크) 부부는 현재 별거 중이며, 이혼 위기에 처해 있다.  다소 철없어 보이는 아빠 더그의 외도 탓이다.  어느날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 더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아이들에겐 할아버지(빌리 코널리)가 되겠다, 의 생일을 맞아 이들 가족 모두는 승용차를 이용해 스코틀랜드로 향하게 된다. 

 

 

아이를 직접 키워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어린 세 남매를 건사한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 모두를 데리고 밖에 외출하는 일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다.  다소 부산스러운 준비 과정을 거치긴 했으나 어쨌든 아이들과 부모는 모두 차에 올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런던에서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길은 험난함의 연속이다.  도로 사정은 우리나라의 휴일과 매 한 가지의 모습이다.  지체와 정체를 밥 먹듯이 만나게 되니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이고, 이로 인해 생긴 사소한 문제로 부부 간 다툼도 잦아진다.  아이들에겐 영락없는 전형적인 어른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우여곡절 끝에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그들 가족, 할아버지는 손주 녀석들을 데리고 풍광 좋은 바닷가로 향하는데...  

 

 

그동안 관람했던 영국 영화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인생과 세상에 대한 나름의 관조였으며, 따뜻한 가족애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그다지 심각하거나 묵직하게 와닿진 않지만 관람후 잔잔한 여운을 느낄 수 있었던 점이 바로 이들 영화의 매력 포인트였던 것 같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건 아마도 영국의 멋진 풍광이 아니었나 싶다.  한번쯤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뛰어난 경관이 늘 나를 사로잡곤 한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다소 엉뚱발랄한 아이들의 시각을 통해 어른들의 그 잘난(?) 면모를 통렬하게 비틀며,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삶의 이정표가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 되묻고 있다.

 

더그의 형은, 그러니까 아이들의 큰 아빠는, 돈을 많이 번 덕분에 그 방면에선 제법 성공한 사람이다.  물론 순전히 어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의 얘기다.  그러나 철철 넘쳐 흐르는 속물 근성만큼은 결코 감출 수가 없는 노릇이다.  가진 것 하나 없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더그 막내 딸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대꾸에 큰 아빠가 제대로 된 방어조차 못하고 일방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바로 그 때문이다.  쌤통이다.  어른의 더럽혀진 영혼이 어찌 순수한 아이들의 영혼을 이길 수 있을까 싶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의 아내는 결코 행복하지가 않다.  낮엔 지극히 평범하고 정숙한 아내로 비치지만, 사람과의 접촉이 없는 밤이 되거나 혼자 있는 공간에선 감춰져있던 병적 증상이 고스란히 드러나곤 한다.  이들 부부의 아들 케네스는 바이얼린 연주가가 꿈인 무척이나 소심해 보이는 아이인데, 왠지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닌, 온통 부모 등 어른들을 위해 짜맞춰진 듯싶다.  자신의 아바타를 원하는 어른들의 욕심이 아이를 짓누르고 있던 게 아닌가 싶다.  실은 소심하지도 않다.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만날 땐 그 누구보다 눈이 반짝거리며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섬뜩했던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여 주인공 역을 맡았던 로자먼드 파이크가 세 아이의 엄마로 등장한다.  어찌보면 극과 극의 장르에 연이어 출연하고 있는 셈이다.  실은 영화를 관람할 때까지 사전 정보를 알지 못했기에 그녀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터인데, 관람하던 도중 뒤늦게 그녀임을 알아차렸다.  '나를 찾아줘'에서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덕분에 눈썰미 나쁜 내 눈에도 그녀의 존재가 들어왔던 셈이다.

 

바닷가에서 이뤄지는 할아버지와 세 남매 간 주고 받는 대화는 이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어른 세계를 비트는 뼈 있는 농담이 오고 가는 사이 깨알 같은 재미마저 느껴진다.  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이제 욕심 따위 모두 버린 듯 어느덧 달관의 경지에 이른 할아버지와, 아직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을 고스란히 간작한 세 아이를 통해 세파에 찌든 우리 어른들의 더럽혀진 영혼을 스스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물론 우스갯소리임이 분명하지만, 신이 인간을 가장 부러워 하는 건 다름아닌 죽음이란다.  불로장생을 꿈꾸는 우리 인간들에겐 의아하게 받아들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이라는 한계를 알기에 우린 현재를 즐기거나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이러니하다는 얘기다.  아울러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아무리 돈이 많거나 잘난 사람조차 모두가 허점과 단점 투성이다. 

 

결국 이 영화는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세 아이의 해맑은 영혼과 시선을 빌려 어른들의 세계를 통찰하며 잘못을 꾸짖고 있다.  어른들의 삶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토록 꼬이게 된 것인지 그 원류를 되짚어보게 해준다.  세상에 상처 받지 않은 영혼은 단 한 명도 없다.  아울러 애써 감추려들지만, 사실 나를 포함한 그 누구든 부족함 투성이다.  부족함 천지에, 내상을 입은 영혼들을 조심스레 어루만져주는 건 결국 아이들의 꾸밈없는 행동을 통해서다.  신록이 한없이 푸르러지는 계절이다.  때마침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5월, 요맘때 더없이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감독  앤디 해밀턴, 가이 젠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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