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내가 아내의 '자뻑'을 응원하게 된 이유

새 날 2014. 6. 17.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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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때의 십년 세월이란 정말 어떻게 지내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 정신줄을 놓고 보내온 시기이다.  아이의 양육 탓이다.  아이를 늘 낀 채 직접 돌보지 않고 그저 곁에서 도와주는 시늉만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정신 사나웠는데 양육 책임을 총체적으로 직접 떠안았을 아내는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꼬..

 

결론적으로 아내나 나나 할 것 없이 30대의 시기란 '잃어버린 10년'이다.  아이들이 일정 나이가 되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내 나이 40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릇 40대란, 청춘이란 개념으로부터 제법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후로 시간의 흐름은 왜 그리도 빠르기만 한지.. 

 

30대 때만 해도 여전히 청춘 행세가 가능할 만큼 외모나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큰 변화를 느낄 수 없었지만, 물론 유독 정신 없던 시기라 그랬을런지도, 40대는 엄연히 달랐다.  결국 청춘이란 녀석은 눈 깜짝할 사이 우리 시야에서 저만치 사라져 버린 셈이다.

 

애 엄마들이라면 모두들 비슷한 상황이었겠지만, 정신없이 살다 보니 친구 만나는 일도 등한시하게 됐던 아내, 무려 10년만에 초등학교 절친들을 만나게 됐단다.  카톡으로 자기들끼리 뭐라 쏙덕이더니 약속을 정했는가 보다.  주말 하루를 모처럼 친구들과 보낸다는 생각에 들뜬 아내, 이옷 저옷 꺼내 입어보며 분주하게 준비하더니, 대뜸 내게 저녁식사는 나가서 먹든지 아니면 찾아 먹으라는 말 한 마디만 툭 던져 놓은 채 훌쩍 떠나버렸다.  밤 늦게 돌아온 아내,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날 친구들과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기 시작했다.



세 명의 친구 중 한 명을 모 전철역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친구가 오지 않더란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가 하얗게 쇤 웬 할머니 같은 여자가 주변에 서 있었고, 실은 그녀가 바로 그 친구였다, 아내는 마냥 기다리기만 했단다.  그녀가 설마 자신의 친구이리라 전혀 예측 못 했던 아내다.  불과 10년만에 놀랍게 변한 친구의 외양에 충격을 받은 아내는 이제사 짐짓 자신의 나이를 돌아보게 되더라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변할 줄이야..' 

 

머리도 머리지만, 예전과는 달리 살찐 외양 때문에 알아보기가 더욱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머지 두 친구들 역시 쌍커풀 수술에, 떡칠한 화장으로 두껍게 얼굴을 가리고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아내의 표현.. 

 

 

결국 무얼 말하려 한 걸까?  아내는 머리도 쇠지 않았을 뿐더러 살도 적당히 찌고, 성형을 전혀 하지 않은 자칭 자연미인에, 화장도 진하지 않아 순수 그 자체라는 걸 굳이 내 앞에서 강조하고 있던 셈이다.  한 술 더 뜬 아내는 내게 이렇게까지 말한다.  물론 난 이런 표현, 제발 삼가했으면 하는 게 솔직한 속내다. 

 

"난 친구들에 비하면 심하게 동안인 거야, 당신이 보기에도 그렇지 않아?  이런 나와 함께 사는 당신은 정말 행복한 줄 알아야 해"

 

그래,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족하며 사는 것도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니, 아내의 자뻑을 그대로 인정해 주자며 그냥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어제는 길을 가다 신호등 앞에서 예전에 아들 녀석과 단짝이었던 아이의 엄마를 우연히 만났는가 보다.  그녀는 무용을 전공한 여자라 몸매 관리가 이뤄져 특별히 살이 찌거나 하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런데 얼굴은 그렇지 않았는가 보다.  눈가를 비롯 요소요소에 주름이 자글자글 하더란다.  순간 병이 또 도졌다.  거울을 보며 한다는 소리 좀 봐라. 

 

"아무리 봐도 난 너무 동안인가 봐.  다른 여자들은 전부 늙었는데 난 늙지도 않잖아" 

 

이쯤되면 심각한 수준의 자뻑이었다.  아니 병적 증세 아닌가 싶을 정도다.  솔직히 내가 보기엔 모두가 다 그저그런 전형적인 한국형(?) 아줌마들이었다.  도긴개긴?  오십보백보?  여튼 그러했다.

 

또래들의 급격히 노화된 모습을 통해 상대적으로 나이를 덜 잡수신 것으로 착각하는 아내, 아마도 그를 통해 지나온 세월에 대해 보상 받고 싶은 심리가 작용하고 있었을 테다.  이런 방식으로라도 세월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다면, 그깟 자뻑 쯤 뭐가 그리 큰 대수겠는가.  안 그런가?  때문에 난 앞으로도 아내의 자뻑을 적극 응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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