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망상과 일탈의 멋진 앙상블

새 날 2014. 1. 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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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 없이 새날은 밝았다.  하지만 여느때완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해가 바뀌고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중압감 때문이리라.  2014년이 힘차게 시작됐다.  모두들 새로운 희망에 한껏 부풀어 있을 테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한 번 돌아다 보자.  어떤가?

 

새해 벽두부터 도시가스요금이 5%나 인상됐단다.  가뜩이나 추운 계절, 우리의 수축된 피부 세포들을 더더욱 움츠러들게 할 만한 짜증나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계획했던 일들 중 뜻대로 된 게 별로 없어 올해라고 하여 딱히 전망이 밝을 것 같지도 않다.  물가는 사정 없이 오르는데 우리네 수입은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고, 직장에선 잘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상사 눈치 보기 바쁘지만, 이마저도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에 한숨이 절로 나오게 한다. 

 

자영업자나 소기업을 영위하시는 분들 또한 갈수록 팍팍해져가는 경영 여건 때문에 죽을 맛이다.  비단 경제적인 환경만 그러하랴.  우리를 둘러싼 주변은 또 왜 이리 시끄러운가 모르겠다.  황소고집의 불통대장인 분께서 대통령이 되더니 나라 전체가 시장통 마냥 시끌벅적하다.  경기가 살아나는 조짐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일본의 장기 불황을 그대로 답습해 가는 건가?  두렵다.


 

주변의 좋지 않은 모든 상황이 나를 옥죄어오는 느낌이다.  어디론가로 튕겨져 버렸으면 좋겠다.  멀리, 그리고 오래일수록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느낌이다.  아니 그도 아니라면 잠시 잠깐동안의 콧바람이라도 쐬었으면 원이 없겠다.  그래, 일탈이다.

 

 

중년의 소심하기 그지 없는 월터(벤 스틸러)는 잡지사에서 사진 편집일을 담당하고 있다.  16년째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오고 있는 중이다.  가장으로서 노모를 극진히 모시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아직 미혼이다.  최근 회사 내에서 마음에 드는 처자 하나를 발견했다.  36살의 멜호프(크리스틴 위그)다. 

 

 

그녀가 가입한 결혼 매칭 사이트에 따라 가입한 그, 자신을 내세울 만한 특별한 이력이 없어 프로필란을 매우는 일이 여간 곤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네처럼 평범한 일상에 파묻혀 몰두한 나머지, 이른바 먹고사니즘에 심취하여, 자신을 돌아볼 시간과 여력이 없었던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필의 빈칸을 완성해야 했다.  여성들로부터의 매칭 요청에 있어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어 그가 기록한 생애중 가장 특별한 일이란 결국 피닉스에 가봤던 일이란다.  너무 특별해 보인다 ㅠㅠ

 

 

그런 그에겐 독특한 취미 하나가 있었다.  다름 아닌 가끔 망상에 빠지는 일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조금 심해 다른 이들이 멍하니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는 그를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그리고 자주 빠져들곤 했다.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그에게도 직접적인 타격을 가해왔다.  잘 나가던 잡지사가 인터넷매체에 밀려 폐간할 위기에 처해졌고, 때마침 회사의 매각이 이뤄지게 됐다.  구조조정의 상황에 놓이게 된 회사 분위기는 더 없이 살벌해졌고,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를 새로운 경영진이 회사를 장악한다.  이제 회사는 잡지 발행을 중단한 채 인터넷 잡지사로의 변신을 꾀하기로 했고, 월터에겐 마지막 오프라인 잡지의 표지사진을 멋지게 뽑으라는 특명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에게 전달된 25장의 사진 중 정작 표지에 쓰일 사진 한 장만 없어져 이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게 되는데...

 

 

월터의 망상 속에서 이뤄지지 않는 일이란 없다.  구조조정을 위해 들어온 경영진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맞닥뜨려진 상황, 월터는 그를 비아냥거리거나 심지어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한다.  통쾌하여 대리만족감마저 얻을 수 있던 상황이다.  평소 마음에 들어하던 멜호프를 보면서도 속앓이만 하던 월터, 망상 속에선 멋진 남성으로 변신하여 그녀에게 대시하기도 한다.  물론 망상에서 깨어나 돌아온 현실은 시궁창 그 자체였다.

 

 

하지만 월터의 망상은 단단한 껍질을 깨고 갓태어난 동물들 마냥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답답함과 소심함 그리고 모든 속박을 훌훌 털고 자신의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영화 제목처럼 점차 그의 상상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일생에 있어 피닉스에 가봤던 게 그의 가장 큰 경험이었거늘, 사라진 사진 한 장을 찾기 위해 그는 그린란드를 비롯하여 아이슬란드, 그리고 히말라야산맥의 오지에까지 직접 찾아가는 모험을 감행하게 된다.

 

 

물론 그 여정이 녹록지는 않다.  때로는 바다에 던져져 상어와 사투를 벌여야 할 때도 있고, 화산 폭발을 피해 폭풍 같이 도망가야 하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도 직접 경험한다.  히말라야산맥에 오르는 길은 희박한 산소로 인해 말 그대로 고행길이 따로 없다.  그러나 그를 이토록 무언가에 홀린 것과 같이 세계 오지를 돌아다니게 만든 원천은 바로 다름 아닌, 그의 일에 대한 열정과 망상이 빚어낸 멋진 합작품이었다.

 

 

보통 판타지라고 하면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나와 마치 만화와도 같은 상황을 연출하거나 가공의 캐릭터가 등장하여 환상적인 가상의 스토리를 통해 이끌어나가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데, 오히려 이 영화는 우리의 내재되어 있던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꿈을 대리만족시켜 줄 만큼 시원시원한 화면과 이야기 전개로 진정한 일상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여담이지만, 그린란드에 도착하여 렌트한 차량이 예전 대우자동차의 빨강과 파랑의 마티즈여서 무척 반가웠다는.. 

 

 

다시 새해가 밝았다.  비록 현실의 삶이 고달프고 지친다 하더라도 이 영화에서처럼 망상을 실제 현실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대리만족만으로도 일탈에서 오는 희열을 조금은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의 멋진 풍광은 여러분들의 오염된 안구를 정화시켜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고, 시원스럽고 유쾌 통쾌한 극의 흐름과 내용은 영화관을 나오는 당신의 입가에 그윽한 미소를 만들어줄 게 틀림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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