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예민한 감각으로 세상과 마주하기 '내가 걸어서 여행하는 이유'

새 날 2018. 7. 2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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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비오듯 줄줄 흐르는 끔찍한 더위의 연속이다. 일찌감치 시작된 찜통더위가 평소 같았으면 피서객들로 미어터지게 할 법한 해수욕장 등 전통적인 피서지를 되레 썰렁하게 만들고 있다 하니 그 위력이 실로 대단하다. 더워도 너무 더우니 다들 밖으로 나가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이다. 해변 등은 일사량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실외보다는 차라리 시원한 실내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덥고 습한 기후 속에서 무거운 배낭을 훌쩍 짊어진 채 자신이 목표로 하는 지점을 향해 열심히 걷다가 일사병에 걸려 당장 쓰러져도 힘든 여정을 결코 중단하지 않고 오히려 걷기 여행을 더욱 즐겨하는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 지구본만 보면 황홀한 기분에 빠져들 만큼 '지구본 성애자'였던 프랑스 소설가 올리비에 블레이즈가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발로 모든 대륙을 밟아가며 세상의 구석구석을 탐험해보고 싶단다. 세상의 모든 언어를 자신의 귀로 직접 들으며 지구촌 곳곳의 뙤약볕 아래에서 피부를 검게 그을려보고 싶단다. 이 책은 평소 공간에 대해 지독한 열망에 빠지고, 그래서 걷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던 그가 40대에 이르러 비로소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맨몸으로 횡단하면서 경험한 것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다양한 탈 것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걷기 여행은 그야말로 원초적이다. 전자를 디지털에 비유하자면 후자는 아날로그에 견줄 만하다. 걷기 여행은 그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다. 세상의 길 대부분은 사람이 걷도록 닦여 있기보다 오롯이 자동차 등을 위해 만들어진 경향이 크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길을 걷는 행위는 때때로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 물론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특히 도심권을 벗어날 경우, 즉 인구 밀도가 느슨한 지역일수록, 사람이 걷도록 닦아놓은 길은 희박해지게 마련이다. 국도로 접어들면 보도가 아예 없는 지역이 즐비하니 말이다. 길과 관련한 시스템은 이렇듯 대부분 자동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저자처럼 걷기 여행을 특별히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혹시 모를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명 사람이 사는 세상임에도 기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평소에는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걷기 여행의 가장 큰 적은 자동차일지도 모르겠다는 저자의 하소연은 결코 엄살이라고 볼 수가 없다. 자동차 등 탈 것을 이용하는 여행은 우리에게 안락함과 편리함 그리고 시간을 단축시키는 마법을 제공해준다. 반면 걷기 여행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행위이며, 시간을 통제하기도 어렵게 하는 등 어찌 보면 문명을 거스르거나 스스로 걷어차버리는 가장 미련한 짓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요즘 같은 날씨 속에서 걷는 행위는 그야말로 자살 행위에 가깝다.


ⓒpixabay


물론 저자가 이 책에 정성껏 풀어놓은, 걷기 여행을 통해 몸소 경험한 것들이 결코 미련한 짓이라고 볼 수는 없다. 자연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고만 하던 인간으로 하여금 모처럼 자연 앞에서 민낯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길을 걷다 보면 평소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고, 들을 수 없었던 소리들이 들려 오며, 느낄 수 없었던 감성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고 민감해지면서 세상의 모습이 달리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참 웃기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걸으라고 만들어진 인간의 두 다리가 문명의 발달로 통 걸을 기회가 없다 보니 이제는 운동이라는 인위적인 과정을 통해 그 부족함을 메우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평소 시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형형색색의 펜으로 일정표를 가득 채운 뒤 뿌듯하기라도 한 양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꼴이 딱 그짝이다. 그러나 촘촘하게 짜놓은 일정과 미리 맞춰놓은 알람은 알고 보면 시간을 통제하기보다 되레 그에 종속되어 있음을 반증한다. 오로지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만 소지한 채 길 위로 나선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태양의 움직임과 그림자의 길이 그리고 방향만이 현재 자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말해준다. 시각은 물론, 요일이며 날짜 따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해준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짜놓은 시간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걷기 여행이란 무릇 그 출발 지점은 뚜렷하게 알 수 있으나 종착 지점만큼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의 삶과 매우 유사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더구나 그 어느 경우보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걷기 여행을 하다 보면, 애초 세운 계획이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간 계획도 그렇거니와 현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변수들이 애초의 계획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무수하게 주어진 선택지 속에서 다양한 변수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는 바람에 어디로 튈지 예단하기가 쉽지 않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다양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기쁠 떄도 있지만, 더러는 슬플 때도 있다. 화가 날 때가 있는가 하면 난관에 부딪힐 때도 있다. 걷기 여행 역시 마찬가지다. 평지를 걸을 때가 있고, 울퉁불퉁한 자갈밭을 걸을 때도 있다. 요즘처럼 찜통더위 속에서 걸어야 할 때가 있으며,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걸어야 할 때도 있다. 아주 가끔은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산을 오르내려야 할 때도 있다. 걷기란 이렇듯 삶의 본질을 터득하게 해준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깨끗하게 닦인 길을 매끈한 자동차로 재빨리 달리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가 다져놓은 길보다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험한 길을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천천히 걷고, 예민한 감각으로 이 세상을 오롯이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사는 이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슬쩍 남기고 오는 것도 꽤나 멋진 일 같지 않은가?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친다면 미처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걷기를 통해 비로소 우리 시야에 들어오며, 온몸의 세포를 민감하게 자극하는 새로운 감성으로 폭발하듯이 우리의 신체가 반응해 온다면 이 또한 흥미롭지 않겠는가?



저자  올리비에 블레이즈

역자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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