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아내의 흰 머리카락 뽑는 일이 행복한 이유

새 날 2015. 1. 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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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새해를 맞은 지 하루 이틀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겠군요.  저는 열심히 인터넷 검색 삼매경에 빠져들었고, 아내는 거울 앞에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아내의 단말마와도 같은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당연히 놀랐겠죠?  전 무슨 일이냐며 대뜸 물었습니다.  뜬금없이 속상해 죽겠다며 하소연하는 아내입니다.  이유인 즉슨 이렇습니다.  머리를 살피다 보니 정수리 부근에서 흰 머리카락 군락지를 발견했다는 겁니다.  한 두 가닥도 아니고 무려 뭉텅이로 무리를 이루고 있더랍니다.

 

"뭐 그따위 일로 그리 놀라나 이 사람아"

 

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며 하고 있는 일에 더욱 열중했겠죠?  지금 이 순간 제겐, 현재 하고 있는 일이 가장 가치가 있을 테니까요. 하하..  암요, 그렇고 말고요.  그런데 아내가 핀셋을 꺼내며 제게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달라는 겁니다.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 무척이나 짧은 시간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제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우선 현재 몰두하고 있는 일이 방해를 받게 되니 솔직히 아주 조금은 짜증 비슷한 게 속에서 올라오고 있었겠죠?  하지만 냉정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저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을 만큼 막강한 권한과 내공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남편들의 운명이 비슷하지 않을까요?

 

제가 만약 귀찮다며 이를 거부한다면, 그 뒷감당은 차마 말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후폭풍으로 다가오리라 예상되던 찰나입니다.  때문에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게 가장 현명할지 여러 갈래를 놓고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속으로는 상당히 귀찮았지만, 전 결코 이를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래?  알았어 뽑아줄게"

 

흔쾌히 승낙한다는 듯 억지 제스처를 취하며 핀셋을 받아들고 흰 머리카락 공략에 나섰습니다.  실은 굉장히 귀찮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찌보면 무척이나 하찮고 귀찮은 작업일지도 모르는 이 일을 실제로 행하면서 문득 다른 생각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지난해 연말 즈음 모 언론사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던 한 영국 여성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입니다.

 

샬롯 키틀리 페이스북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남편과 2명의 어린 자녀를 둔 채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극작가 샬롯 키틀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생전에 남긴 글 중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살고 싶은 나날이 저리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되지 않는다.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준다  ...  중략  ...  하얗게 센 머리카락 한번 뽑아봤으면 좋겠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니까. 나는 한번 늙어보고 싶다"

 

제가 귀찮고 하찮게 여기기까지 하던 하얗게 센 머리카락 뽑는 일조차 그녀에겐 일생의 소원이 될 만큼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우리 삶에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여실히 깨닫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문득 떠올리며 전 마음가짐을 고쳐 먹은 뒤 열과 성을 다해 아내의 하얀 머리카락을 인정사정 없이 뽑아주었으며, 이런 기회를 누군가 준 것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답니다.  정말로요.

 

우리가 눈물이 나도록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늙어가는 일조차 매우 행복한 일이라는 사실을 전 뒤늦게나마 아내의 하얗게 세어가는 머리카락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혹시 해당 기사를 아직 못보신 분들이 계실 것 같아 링크해 드립니다.  "눈물이 나도록 살아야 하는 이유"..암 말기 엄마의 글 '감동'

 

모두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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