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삶이란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새 날 2014. 10. 3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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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가 31일에 있을 故 신해철(앞에 '故'자를 넣으려니 아직은 너무 어색하다)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한단다.  이 소식을 듣고 있자니 문득 얼마전 관람했던 영화 '안녕 헤이즐'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시한부 삶을 사는 남자 친구에게 헤이즐이 그를 위한 '추도사'를 읽어주던 장면 말이다. 

 

그의 삶엔 시한부라는 족쇄가 채워졌지만, 그가 살아있던 때를 기억하거나 함께 누렸던 삶을 예찬하고 또한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랑하는 이의 속마음을 영원히 이별하기 전 확인하였으니 나름 작은 기쁨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물론 주어진 천수를 다 누릴 수 없다는 자체가 원망스러운 일이거늘, 그깟 추도사를 미리 확인하는 게 무슨 대수냐고 한다면 그 또한 결코 틀린 말은 아닐 테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세상을 떠난 뒤 읽히는 추도사는 망자를 위한다기보다 남아있는 자들의 슬픔을 달래기 위한 요식 행위 아닐까 싶다.  영화 '안녕 헤이즐'에서도 비슷한 대사 한 꼭지가 등장한다.  장례식은 망자를 위한다기보다 남은 자들을 위한 의식이라는.. 

 

때문에 헤이즐은 정작 남자친구의 장례식에선 그녀의 속마음이 담긴 추도사를 읽지 못하고, 아니 읽지 않고, 형식적인 인사말로 대신하게 된다.  그녀의 속마음은 그가 살아있을 때 이미 전달됐기 때문일 테다.

 

'안녕 헤이즐' 속 한 장면,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신해철 씨의 급작스런 죽음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죽음의 시기를 미리 알고 있는 게 좋을까 그렇지 않으면 모른 채 맞이하는 게 좋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신해철 씨 역시 처음 배가 아파 병원에 들어설 때만 해도 이런 결과를 전혀 예측 못했으리라.  비단 본인만 그랬겠나.  그의 가족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 모든 팬들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테다.  하지만, 결과는 황망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러한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운명이란 거다.  이산가족들은 6.25 전쟁 당시 혼란스러운 상황을 피할 요량으로 잠시 집을 떠나온 건데, 갑작스레 휴전선이 그어져 오도가도 못한 채 어느덧 60년이란 세월을 훌쩍 떠나보내오지 않았던가.



뜬금없지만, 영화 따위를 보고 있자면 왠지 시한부 삶이 막연히 아름다워 보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영화라는 매체 특성이 갖는 과대포장 장치 탓일 테다.  실은 삶을 정리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주는 효과가 만만찮다.  그렇지만 다른 관점에서 볼 땐 미리 예고된 죽음 앞에서 우리가 과연 얼마나 초연해질 수 있을까 심히 우려스럽기에 차라리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맞이하는 죽음이 바람직스러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삶이란, 어쩌면 이별을 준비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인연이 만들어졌다는 건 이미 이별을 예고하는 것일 테고, 결국 본인이 떠나든 아니면 상대방이 떠나든, 그게 영원히 떠나가게 되는 상황이든 그렇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떠나가게 되든, 어쨌든 우린 모두 반드시 떠나야 하며 또 이별을 해야만 할 테니 말이다. 

 

때로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오랜 인연을 차곡차곡 쌓은 뒤에 이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우리의 삶은 어쩌면 예측 가능한 이별부터 예측 불가능한 이별까지, 연속되는 이별에 대한 내성을 키워가며 만들었던 인연을 하나하나 지우는 과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비가 와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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