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35년 간극마저 무디게 한 기묘한 데자뷰

새 날 2014. 9. 22.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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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양이 결혼도 하지 않고 정치나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김포공항에 가면 오고가는 사람들을 다 볼 수 있는데, 문세광사건 이후로는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것도 볼 수 없게 됐다"

 

위의 발언과 당시 문세광의 총격 피하는 모습을 따라했다는 이유로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를 받아 처벌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가족 8명이 간첩으로 검거된 적이 있는데 그 중 1명이 내 동무였고, 남한의 어부들이 북한으로 납치돼 가면 북한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해주고 구경도 많이 시켜준다.  영세어민 중에 스스로 월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발언이 북괴를 이롭게 한 것이라며 그에게 반공법(현재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마저 추가됐습니다.  35년전인 1979년의 일입니다. 

 

ⓒ연합뉴스

 

당시 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모씨는 박정희 대통령 일가를 희화화해 언급했고, 북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했다는 이유로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어진 1982년의 항소심에서 그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김씨는 재심을 신청했고 결국 기소된 지 35년만에, 그리고 항소심이 있은 지 32년만에 무죄 선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21일 서울고법에서의 일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35년전 당시 김 교사의 희화화 대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맏딸 박근혜 씨가 2013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고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일가를 희화화했던 사안에 대해 재심을 통해 잘못된 판결이었노라며 무죄가 선고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정치 풍자에 대해선 35년전 당시처럼 또 다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조금의 아량조차 없이 심지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족쇄마저 채워지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뉴시스

 

가장 비근한 예로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됐던 박근혜 대통령을 고인이 된 아버지에 의해 조종당하는 허수아비로 묘사했던 홍성담 화백의 '세월오월'을 사례로 들 수 있겠습니다.  결국 수차례의 수정과 보류 끝에 해당 작품의 철거를 결정하게 됐지만 이는 우리 사회에 무수한 상처만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해외 언론의 시각이 아주 가끔은 객관적일 때가 있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30일 자신들의 기사를 통해 박정희 정권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더 자유롭지만, 정치 풍자를 시도하는 예술가들은 종종 괴롭힘을 당하고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한다며 경직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행적에 대한 미스터리가 불거진 이후의 움직임은 더욱 우려를 자아내게 합니다.  사이버상 허위사실 유포사범을 단속하겠다며 검찰이 직접 칼을 빼든 채 전담수사팀을 설치하고 선제적 대응에 나선 것입니다.  포털 서비스와 같은 인터넷뿐 아니라 SNS 등 모든 온라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대통령에 대한 악의적 허위사실 유포자와 확산자 그리고 단순 전달자까지 엄벌에 처하겠노라 선언했습니다. 

 

ⓒ쿠키뉴스

 

그런데 이러한 선언이 단순히 엄포로만 그치지 않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행적의혹 보도'와 관련한 고발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이 일본 산케이 신문사뿐 아니라 해당 신문이 보도한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누구와 만났을까' 제하의 기사를 단순히 한국어로 옮긴 사람에게까지 명예훼손 혐의로 사법처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 산케이신문의 기사를 번역 보도한 '뉴스프로' 번역 기자의 자택을 지난 19일 압수수색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번역 기자는 산케이 보도 기사에 덧붙여 논평 형식의 기사를 추가로 작성했는데, 검찰은 이의 내용에 명예훼손 혐의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악의적 허위사실 유포 행위는 우리 사회에서 분명히 없어져야 할 나쁜 폐단임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국경없는 기자회나 여타 선진국가에서도 우려 표명을 해오고 있듯 이러한 간섭이 자칫 표현의 자유를 옭아매고 사상의 자유마저 통제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여 내심 불안합니다.  단순한 번역 행위에 자신의 의견을 살짝 덧붙이는 행위마저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현재는 번역 기자에게 칼날의 끝을 겨누고 있지만 결코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권력이 마음먹기에 따라 그 대상은 언제든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검찰은 대통령의 모독 행위를 막기 위해 온라인 상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허위사실 게시물을 즉시 삭제키로 했답니다.  국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내내 실시간 감시하겠노란 의미입니다.  

 

단순한 풍자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경직성을 드러내고 있는 현 정권이기에 과연 대통령에 대한 모독 행위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볼 것이며, 명예훼손의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아울러 그 특성상 사안에 따라 그때 그때 달라질 수 있는 데다 자칫 우리 모두가 검열의 대상에 오를 수 있고, 또 그에 따라 누구든 범법자가 될 여지마저 있기에 우려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5년전 부친이 그랬듯 또 다시 그 2세에게로 이어지는 이 기묘한 데자뷰의 흐름은 35년이란 긴 시간적 간극마저 무색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간극 사이엔 20세기와 21세기를 가르는 명확한 좌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울러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물리적 토대는 분명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자유를 옭아매려는 권력의 오만한 속성은 한 세대를 훌쩍 뛰어넘으며 21세기로 넘어왔지만, 왠지 이러한 시간의 흐름마저 애써 감추려는 듯한 눈치입니다.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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