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흑형치킨? 철없는 인종 비하 표현이 위험한 까닭

새 날 2014. 1. 27.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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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크레파스를 이용해 그림을 그릴 때면 사람의 피부색에 이른바 '살색'이라 불리는, 연한 살구색으로 채웠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런데 지구촌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실제 살색엔 백인 흑인 황인 등 크게 세 종의 색이 존재한다.  물론 그 뿐만이 아닐 테다. 

 

좀 더 넓게 보자면, '삐삐'의 홍조 띈 붉은색이나 '슈렉'의 녹색 등 조금은 특이하다랄 수 있는 피부색들도 이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따라서 그동안 우리는 황인종이란 이유만으로 보통명사인 '살색'을 우리의 피부 색상에 매치시키는 우를 범해 왔던 셈이다. 

 

외국에서의 한인 비하 사례

 

피부색으로 인한 인종 차별이나 비하 논란은 전 세계적으로 현재진형형의 상황이며, 비단 우리만의 문제도, 아울러 피부색에만 국한된 문제도 결코 아닐 테다.

 

얼마전 미국과 스페인의 스타벅스 매장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한국인이 주문한 메뉴의 컵 표면에 '찢어진 눈'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발각돼 심각한 한인 비하 논란을 불러온 바 있다.  '찢어진 눈'은 서양권에서 동양인을 비하할 때 흔히 쓰이는 표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타벅스의 한인 비하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한인사회가 발칵 뒤집혔던 건 주지의 사실이고, 심지어 스타벅스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까지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듯 유럽과 북미권에 위치한 선진국들로부터 당하는 한국인 비하에 대해서는 기분 나빠해하며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성토하기 바빴던 우리, 정작 우리보다 피부색이 검거나 왜소한 체격을 갖춘 외국인에 대해선 그보다 더욱 심한 인종 비하적 표현을 서슴지 않는 이중성을 보여오고 있다. 

 

이태원 '흑형 치킨' 논란

 

26일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서울의 이태원 모 주점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일명 '흑형 치킨' 논란이 바로 그의 극명한 예다.  다른 곳도 아닌 외국인들이 즐비한 이태원 한복판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명칭의 치킨이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아연실색케 한다. 

 

이태원은 외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거주 장소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우리 사회 내에서 가장 개방된 다문화의 메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과 계층, 종교를 감싸안는 포용과 관대함을 지닌 지역이 다름 아닌 이태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철없어 보이기까지 한 행태를 관용과 포용만으로 모두 감싸안을 수 있는 걸까?

 

언뜻 생각하기엔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통용되는 최신 유행어를 음식 메뉴에 접목시켰다는 부분에서 기발하다거나 센스 만점의 발상이라며 이를 치켜세울 수 있는 측면도 엿보일 듯싶다.  하지만 그 유행어 자체가 인종 차별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흑형'은 '흑인 형'의 줄임말로서 흑인 남성을 지칭할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치킨이 그에 입힌 양념 탓에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검은색의 독특한 색깔을 띄게 된 것이고, 이 검은색으로 인해 '흑형'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을 테다.  이쯤되면 허용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임계치를 넘어도 한참을 넘어선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는 인종 차별 내지 비하의 흔적들

 

우린 단순히 컵에 그려진 '찢어진 눈'만으로도 우리를 비하한다며 소송에까지 나선 상황이다.  그렇다면 흑인의 피부색에서 기인한 흑인 남성 지칭의 '흑형'이란 표현을 음식 메뉴로 사용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우리 입장에선 피부색이 그와 다르기에 그저 뛰어난 발상의 표현이고 기발하다며 웃어 넘기면 그만인 일일까?

 

비하는 업신여겨 낮추어 표현함을 일컫는다.  다른 것도 아닌, 먹는 음식에 피부색을 빗대어 표현한 건 비하 중에서도 매우 저열한 축에 속한다.  음식을 대상으로 놀림거리를 만들었다는 자체도 용서가 안 되지만, 피부색을 조롱하는 듯한 쓰임새는 더더욱 용서할 수가 없다.

 

우리 사회, 평소 피부색에서 비롯된 인종 차별 행태가 횡행해 오고 있다.  일례로 원어민 영어 강사 등 외국인 일자리 채용시 '백인만 가능' 하다거나 '백인 구함' 과 같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해도 직접 문의시 '흑인은 절대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전철 등의 대중교통 이용시 백인에 대해선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도 흑인이나 아랍권 등 우리보다 피부색이 조금이라도 검은 외국인이 탔을 경우 부러 자리를 피한다거나 이를 상당히 의식하는 행동을 보이는 게 보다 현실적인 우리들의 모습일 테다.

 

우리 사회에는 사람의 경제적 능력과 학벌 따위의 기준으로 사람을 서열화하거나 자신보다 못해 보이면 쉽게 무시하는 좋지 않은 습성이 배어있다.  더군다나 외래 문화에 대해 그다지 넓은 포용력을 갖추지 못한 탓에 피부색이 다르다거나 우리보다 못한 국가라는 편견이 결합될 경우 그 결과는 무시 못할 정도의 더욱 우려스러울 만큼의 악화된 형태로 발현되곤 한다.

 

아마도 이러한 의식 저편엔 주로 선진국이자 흠모의 대상이기도 한 미국 등 백인권 국가의 영향을 암암리에 받은 탓이 적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시킨 미국이지만 피부색을 둘러싼 인종 비하와 차별 논란은 여전히 끝이 없다.  미국 뉴욕에선 얼마전 유명 백화점들의 인종 차별적 행태로 인해 미국 사회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적이 있다.  흑인들이 백화점에서 비싼 물건을 산 게 의심스럽다며 경찰까지 출동시키는 해프닝을 벌인 것이다.  뿌리 깊은 미국 국민들의 인종 차별적 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다.

 

'흑형치킨'류의 철없는 인종 비하 표현이 위험한 이유

 

다시 이태원 '흑형 치킨' 얘기로 돌아와 보자.  최근 전국적으로 확산일로에 있는 AI 탓에 치킨집과 오리집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그야 말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외국인들이 밀집한 이태원 한복판,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매출을 높여보려는 취지에서 나왔을 법한 신메뉴 '흑형 치킨', 물론 주점 사장님의 작명 센스 자체는 높이 사주고 싶다.  하지만 검은색 닭고기와 흑인을 지칭하는 단어의 조합은 아무리 좋게 받아들이려 해도 인종 비하적 요소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크레파스의 '살색'은 인간의 피부색을 통칭하는 용어로서, 벌써부터 인종 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여 한국기술표준원에 '살색'이란 이름을 바꿀 것을 권고했으며, 이에 한국기술표준원이 '살색'을 관용색에서 제외시킨 바 있다.  이렇듯 인종 차별이나 비하를 막기 위한 노력에는 국가마저 두 팔을 걷고 나선 상황이기도 하다. 

 

단순한 살색 표현만으로도 자칫 인종 비하적 표현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현실 속에서 음식에 피부색 비하의 의미가 담긴 이름을 사용한다는 건 철없는 행동을 떠나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치기 어린 이러한 행동이 자칫 우리의 국가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할 뿐 아니라 또 다른 비하를 낳게 하는 악순환의 연결 고리가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일개 개인에 의해 벌어진 행동이긴 하지만 매우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 이유이다.  무조건적인 포용과 관용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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