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훼손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볼 때면 어떤 기분이 들던가?

새 날 2013. 12. 1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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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의 한 학생으로부터 촉발된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릴레이 열풍이 일종의 사회적 신드롬 현상을 낳고 있다.  이제 시국 현안과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대자보란 형태를 빌려 피력하는 방식이 대학가는 물론이거니와 고등학교, 심지어 지하철역 등 사회 저변 곳곳으로 일파만파 확산되어 가는 중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릴레이

 

군사정권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던 시절, 당연히 지금처럼 정보통신기술이 꽃을 피웠을 리 만무하던 때, 당시 대학 내에서의 의사 소통 방식은 주로 대자보를 통해 이뤄졌다.  하루에도 수십장의 대자보가 새로 붙여졌고, 단체나 개인 명의의 의견은 물론 각종 시국선언이나 성명서, 그리고 집회 안내 등 역시 모두 이를 통해 행해졌다.

 

 

어느덧 대자보란 이름 자체가 왠지 낯설게 와닿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어왔고, 굳이 사회적 변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충분히 변화해 왔음직한, 따라서 그 의미와 쓰임새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을 법도 하다.  실은 시국과 관련한 내용의 대자보를 써서 붙이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던, 때문에 대자보 하면 으레 그러한 용도로만 이해되었던 당시와 비교해 볼 때, 이번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한 장이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불러올 수 있다는 자체가 내겐 마냥 신기하게 다가온다.  아울러 지금은 대자보 한 장 작성하여 붙이는 일도 크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에서 격세지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민주화란 달콤한 열매를 따낸 이후의 세대들에겐 더 이상 시국과 관련한 대자보를 써서 붙일 당위성이 사라졌다.  그보다는 가장 큰 난관이자 현실로 다가오는 취업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사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만 했다.  먹고사니즘 자체만으로도 너무 큰 중압감으로 다가오기에 현실 참여와 같은 일 따위 이들에겐 다른 세상 얘기가 된 지 오래다.



그 사이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정권 6년만에 선배들이 피 흘리며 애써 이뤄놓은 민주주의가 과거로 퇴행하고 있었다.  경고음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불거진 부정선거 의혹은 1년이 다 되도록 해결의 기미가 없고, 외려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정치란 그저 남의 얘기 같았고 우리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공시장 개방과 철도 민영화, 밀양 송전탑 건설, 의료 민영화 등 우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지어진 부분까지 옥죄며 들어오고 있었다.  숨통이 점차 조여오는 느낌이다.  이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대자보 훼손과 박 대통령 페이스북 욕설 도배

 

대자보 릴레이는 이러한 불합리한 사회 현실에서의 탈출 욕구로부터 비롯됐다.  대자보에 열광하고 또 그에 직접 응답하는 이러한 행위를, 젊은이들에게 익숙한 SNS에 빗대 표현해 보자면, 온라인에서 공감하는 글을 만나 트윗을 날리거나 리트윗, 혹은 좋아요와 추천 버튼을 누르는 행위에 비견된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일종의 오프라인식 SNS 퍼나르기인 셈이다.

 

 

하지만 어딜 가든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 꼭 있기 마련이다.  '안녕들 하신가요' 대자보 또한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 '안녕하지 못하다'라며 그에 화답하는 긍정적인 내용의 응답이 많았지만, '난 안녕하다'라며 이에 대해 반박하는 의견을 피력하거나 심지어 비아냥 거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어찌 보면 다양한 의견들이 혼재한다는 건 우리 사회가 그 만큼 건강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자보를 훼손하고, 또 이를 자랑 삼아 인증샷을 찍어 커뮤니티에 올리는 일부 몰지각한 부류들 또한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  좋은 취지로 시작된 대자보 릴레이, 큰 맘 먹고 애써 작성하여 정성껏 붙여 놓았더니 다음날 아침 갈기갈기 찢겨 있거나 일부 훼손된 채로 발견된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아마도 참담한 심경일 것 같다.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결코 좋은 기분이 들 수 없을 테다.  생각이 자신들과 다르다고 하여 이런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비난이 가해지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17일 박근혜 대통령의 페이스북이 원색적인 욕설과 비방으로 도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이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자신이 할 수 없는 행동을 대신 해준 사람들이 한없이 고맙고 또 대리 만족감 같은 것마저 느껴진다고? 

 

 

과연 그럴까?  사용된 욕설과 비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한 번 살펴 보자.

 

"서민들은 등골 처휘고 고위층은 더 따스하게 살겠네. 씨X 팔보채 같은 X "개쓰레X"

"박.근.혜.시.X.X"

"정치도 못하면서 정치한다고 엠병할 X"

"밤길 조심해라"

"대통령은 왕이 아니라 국민이 뽑아준 대표다. 그 지위에 올라가서 하는 짓이라곤 자기 뱃가죽을 기름으로 칠하고 자기나라 국민들은 돈이 없으면 나가 뒤지라는 식이다. 난 대통령도 하나의 국민으로 보기 때문에 존칭은 안 쓴다.  아줌마 니 때문에 내 눈수술 비용이 몇 십 배는 올랐어. 장기 팔아도 수술 못 하겠네"

 

물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욕도 못하냐란 의견이 나올 수 있고, 노무현 대통령 때는 더 심한 표현도 했던 당신들인데 뭐 이 정도의 수위로 발끈하냐 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위의 표현을 보고 있자니 실제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비록 속은 후련할지 몰라도, 그 대상이 대통령의 여부를 떠나, 가슴 한켠엔 같은 사람으로서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더 나아가 낯 부끄럽지 않은가?

 

좀 더 신중하고 품위 있게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서로간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예의란 게 있는 법이다.  그 상대가 비단 대통령이라고 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대통령에게 '박근혜 씨'란 호칭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부러 논쟁을 야기시켰던 누구들처럼 단순히 그런 따위를 말하려 함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식의 표현이라면 당신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도로 혐오하고 있는, 일베 회원들의 그것과 다른 점이 도대체 무얼까.

 

우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훼손하고, 이를 자랑스레 일베 사이트에 인증샷을 올린 일부 정신나간 네티즌들의 만행이 괘씸하고 기분 나쁘다고들 하소연하며 이를 성토한다.  그러나 대자보 훼손 망동과 대통령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갖은 욕설로 도배를 하는 행동, 딱히 다른 점이 있을까?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점에선 둘 다 비슷한 행동 양식 아닐까?

 

상대방이 먼저 비아냥거리고 욕지거리를 내뱉았다고 하여 같은 행동을 취하는 건, 육체는 비록 성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덜 여문, 유아적 성장 단계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셈이다.  대통령의 잘못에 대해선 누구든 비판 가능하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이 좀 더 세련되고 품위 있으면 어떨까 싶다.  같은 내용으로 비판을 가하더라도 욕설로 쓴 글은 오히려 읽는 이마저 기분 나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좀 더 다듬어지고 신중한 표현이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너와 나 할 것 없이 모두의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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