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언어의 정원> 비와 사랑에 관한 짧지만 맑은 이야기

새 날 2013. 8. 14. 11:07
반응형

 

누군가 "비 좋아하세요?"  라고 물어온다면 기꺼이 "그렇다"라고 답할 것 같다.  그것도 많이..  물론 가수 비를 언급하는 게 아니다.  대기중의 수증기가 응결되어 구름이 되고 이들 물방울들이 다시 뭉쳐 지상으로 떨어지는, 기상현상 비를 말함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게 아니었는가 보다.  BC카드가 장마철 저녁시간 요식업종의 카드 결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비 오는 날 파전 전문점의 매출액이 평균 3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강우량이 30-80mm 정도 될 때 비가 오지 않은 날에 비해 무려 88%라는 매출액 신장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아무래도 평소 비 오는 날이면 괜시리 마음을 울적케 하거나 감성적으로 변하게 하는 특별한 요소가 있으리라 생각해왔는데, 이를 실제로 증명해 보인 셈이다.



그런데 내가 평소 비를 좋아해온 정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난히 비를 좋아하는 한 소년이 있다.  나의 경우 비 내리는 날이면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향긋한 흙내음을 즐기는 편이지만, 이 소년의 경우 반대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로부터 늘 동경해 마지 않던 하늘의 속살 냄새를 느낄 수 있어 좋단다.  이쯤되면 비를 좋아한다기보다 사랑하는 수준 아닐까?

 

 

때문에 비 내리는 날이면 소년은 정신을 못 차린다.  고등학교 1년생 다카오, 비 내리는 날엔 등굣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걸음이 학교가 아닌 도심의 한 공원으로 향한다.  덕분에 비오는 날의 학교수업 1교시는 무조건 땡땡이다. 

 

 

그는 장래희망이 뚜렷한 학생이다.  그의 관심은 온통 구두 만드는 일에 집중돼 있으며, 때문에 학교와 관련한 일들은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저 심드렁하기만 하다.  물론 공부에도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진행중이다.  틈틈이 아르바이트 등을 해가며 구두 제작에 필요한 용돈 등을 스스로 벌기도 한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일기예보에선 아마도 장마가 시작된다고 알리는 듯했다.  전철을 타고 학교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은 당연히 공원으로 향한다.

 

 

비 내린 길을 저벅저벅 걸으며 무한 감성의 세계에 빠진 그,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평소 즐겨찾던 벤치를 찾았는데, 그곳엔 이미 묘령의 여인이 홀로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27세의 유키노, 분명 처음 본 듯 낯선 얼굴이었지만, 실은 두 사람 낯설지 않은 관계다. 

 

 

이후 그가 비오는 날이면 찾던 공원 벤치엔 여지 없이 그녀가 앉아 있다.  그녀 곁엔 늘 맥주 한 캔과 초콜릿이 놓여 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은 친해졌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으며, 다카오는 그녀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더 자주 비가 내렸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다.

 

유키노 또한 비에 대한 애착이 다카오 이상 되는 듯하다.  비 오는 날이면 회사 출근 대신 다카오 마냥 이곳 공원으로 향한다.  물론 그녀에겐 그럴 만한 나름의 깊은 사정이 있긴 했지만...

 

 

스크린을 가득 채운 화면이 맑다 못해 투명하다.  온통 투명한 색으로 채색된 듯 파스텔 톤의 맑은 수채화가 연상된다.  감독의 섬세한 감성이 모든 이미지 그리고 음악으로부터 뚝뚝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물방울과 잎새 등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도 세심한 터치의 흔적이 느껴져온다.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피아노의 선율은 또 얼마나 청명하던지, 이미지와 극의 흐름에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룬다.  아름답다.

 

 

비 내리는 연못 위로 빗방울이 튀어오르는 장면과 곁에서 물위를 유유히 유영중인 소금쟁이들의 깜짝 놀란 움직임과 같은 세세한 묘사마저 감독은 절대 놓치지 않고 있다.

 

 

동이 트거나 해가 지는 도심의 모습과....

 

 

비 내리는 거리 장면조차도 감독의 여리디 여린 섬세한 감성이 느껴져온다. 

 

 

인물은 2D, 배경의 일부는 3D의 형태가 서로 혼재하고 있어 표현이나 감정 그리고 동작 등이 부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으나 다행히 매우 매끄러우며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이미지를 통한 단순 움직임의 표현뿐 아니라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유키노가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맥주와 초콜릿을 함께 즐기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일종의 미각 장애를 앓고 있어 맥주와 초콜릿 외엔 맛을 느낄 수 없던 것이다. 

 

다카오의 엄마는 띠 동갑인 연하의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다.  아직 15살에 불과한 다카오의 삶이 녹록치 않은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카오와 도심 공원을 통해 연이 닿은 유키노 또한 27살로서 엄마와 엄마의 연인 관계처럼 띠 동갑 연상 연하란 묘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들이 비 오는 날이면 만남을 이뤘던 도심 한가운데의 "언어의 정원"은 이제 그들 두 사람의 사랑의 매개가 되어 비오는 날뿐 아니라 맑은 날조차도 늘 함께하기를 고대하게 만들어준다.

 

 

애니메이션이라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부분이긴 하지만 러닝타임이 무척 짧다.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던 듯싶다.  그래서 그랬을까?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딧이 한동안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 자리에서 뜰 줄을 모른다. 

 

너무 짧아 아쉬웠던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영화가 던지는 감성 메시지에 흠뻑 도취되어 한동안 넋을 잃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상영시간이 무척이나 짧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스크린으로부터 감성 에너지가 가득 느껴져 제법 긴 여운을 남겨준다는 사실이다.  

 

로멘스의 장르를 굳이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일본의 여유와 배짱이 부럽다.  이는 아마도 다양한 장르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마련되어 있고, 또 이를 수요할 만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니 가능한 일이리라.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일 수밖에 없는 이유인 듯싶다.

 

 

덧, 관객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았다.  엔딩 크레딧 끝 무렵에 두 사람의 미래를 암시하는 내용이 흘러나온단다.  이 부분을 못 봤으니 영화의 절반을 놓친 셈인가?  안타깝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