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게 배웅 따윈 없어

일상의 소중함 : 小貪大失, 瓜熟帶落

새 날 2012. 12. 1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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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빅픽처' 속에서의 주인공 벤, 그는 변호사라는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릴적 동경해 마지 않던 사진가에 대한 환상을 늘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사진가라는 제2의 삶을 살게 되어 어마어마한 성공과 명성을 부여잡았지만, 그의 가슴 한켠엔 무언가 씁쓸한 회한 같은 것이 스멀스멀 기어 오르고 있었다. 맞다. 그에게 정작 필요했던 건 지금의 성공과 명성, 부 따위의 것들이 아닌,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그토록 지루하여 그저 벗어나고만 싶어했던 변호사 시절의 평범한 일상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의 일상은 이렇듯 늘 지리멸렬하고 재미없다. 하도 많이 인용되어 식상하기까지 한, 마치 물과 공기의 존재를 잊고 사는 맥락과 비슷하다. 지난주 후반부터 한반도를 엄습해 온 강추위로 세상 모든 것들은 그만 꽁꽁 얼어 버린 상태이다. 하지만 남들 다 얼어붙더라도 절대 얼어선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바로 수도꼭지, 아니 엄밀히 얘기하자면 수도배관? 그래 바로 이놈이다.

 

일요일 저녁까지 잘 나오던 수돗물이 월요일 오전부터 나오지 않는다. 이런 제길슨.. 하룻밤 사이에 완전 꽁꽁 얼어붙었나 보다. 물이 나오지 않으니 평범하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물이 없어 겪는 육체적 불편함 정도야 까짓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나를 괴롭히는 건, 늘 평안하여 그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일상의 불안함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정? 다른 말로 스트레스, 바로 요놈이다.

 

예전 군에 있을 때, 딱딱한 내무반 침상에서의 생활이 난 너무 싫었다. 하지만 1주일 간의 유격훈련을 위해 야외에서의 야영생활을 마치고, 마지막날 밤샘 100킬로 행군을 하며 복귀한 내무반은, 꿀맛처럼 달콤한 느낌이었다. 그토록 싫었던 내무반이 진정 나의 해피 하우스로 둔갑하는, 그런 마술 같은 감격을 맛보았던 것이다. 딱딱한 침상은 세상에 둘도 없는 푹신푹신 침대가 되었고, 칙칙하고 삭막하기까지 한 공간은 어느새 한없이 포근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래 일상의 소중함은 정작 일상이 깨어질 때에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로구나!!

 

  소탐대실(小貪大失)

 

언 수도를 녹이기 위해 예전에 이용했던 설비업체를 수소문했다. 지난해에도 이용한 실적(?)이 있어 조금 싸게 해 달라고 부탁 드려 보았다. 일단은 그쪽에서 가격을 충분히 고려해 보겠다는 긍정적인 답변과 함께 다음날 오후에나 수리가 가능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날은 너무나 추웠지만 운동은 관성에 의해 계속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헬스장에서 조금 땀을 뺀 후 내려오는데, 유독 내 눈에만 띄는 문구가 하나 있었으니...

 

"언 수도 녹입니다" 혹시나 해서 연락처를 적어 다음날 오전에 전화를 해 보았다. 어제 연락했던 설비업체에 비해 1만원을 적게 부르더라. 그래 1만원이면 어디냐. 게다가 바로 올 수 있단다. 그래서 이 업체에 의뢰를 맡겨 버렸다. 3명의 작업하는 분들이 장비 일체를 갖고 오시더니 이쪽 저쪽을 연결하여 본격 해동 작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장비를 바꿔가며 하루 종일 작업한 결과가 제로인 거다. 결국 그날은 포기하고 다음날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이날도 또 다른 장비로 교체하면서까지 나름 열심히 작업한 듯했지만 결과는 역시나 꽝이었다. 어쩌나... 날은 계속 춥고 수도는 언 지 이미 3일이 넘어가고...

 

처음 접촉했던 설비업체는 작년에 이용해 보니,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지던데, 아무래도 이번 업체는 영 어설픈 거다. 그래 한 마디로 1만원 아끼려다 똥 된 거다..-_-;;

  과숙체락(瓜熟帶落)

 

결국 이 업체의 지난한 해동 작업은 중단되었다. 아니 사실은 포기인 거다. 어쩌겠나. 다른 업체에 다시 의뢰하기도 그렇고, 이 업체는 더더욱 그렇고... 에라 모르겠다. 벌써 4일째인데, 날이 풀리면 언젠간 녹겠지.. 지까짓 게 뭐 별 거 있어? 실은 나도 자포자기 심정인 거다.

 

물 없는 세상, 4일 째 생활해 보니 뭐 그럭저럭이다. 역시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글은 이렇게 쓰고 있지만, 실은 정말 일상의 소중함을 뼈 저리게 느끼고 있는 거였다. 다행히 기온이 점차 오르리란 일기예보가 속속 답지하고 있다. 어차피 만물은 자연의 섭리에 의해 돌아가는 것을, 제 아무리 동장군 지가 맹위를 떨친다 해도 언젠간 물러가 따뜻한 기운이 온 세상을 지배할 터, 그러다 보면 액체에서 고체로의 상태가 변했던 물도, 다시 고체에서 액체로 자연스레 변화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수도가 언 지 어언 4일 째를 넘어서니 이젠 머리마저 어찌 되었는가 보다. 자꾸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그런데 그런데... 어제 저녁,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자연히 떨어진다는 말이 있듯, 얼었던 물도 기온이 높아지면 자연히 녹는다는 이치... 실제로 일어났다. 열어 놓았던 수도꼭지를 통해, 헛바람 소리를 신호탄으로 액체 상태의 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 저 놈의 수도꼭지 하나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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