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한 특성화고교생의 죽음이 말하는 것 영화 '다음 소희'

새 날 2023. 3. 2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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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한 특성화고 애완동물과 졸업반에 재학 중인 소희(김시은)는 유난히 춤추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한창 취업을 준비 중인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또래들과 어울려 인기 아이돌의 춤을 따라하곤 했다. 춤 실력도 빼어난 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근래 반가운 소식 하나가 전해진다. 그 어렵다는 취업문을 뚫은 것이다. 아이가 취업한 곳은 대기업의 하청 업체였다. 담임교사와 부모 등 주변 어른들은 대기업에 취업했다며 반색 일색이다.

 

소희가 몸담게 될 곳은 국내 굴지의 통신사 콜센터였다. 이곳에서 수 개월 간의 현장실습을 거치고, 이후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을 경우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는 수순을 밟는다. 부푼 꿈을 안고 첫 임무를 부여받은 소희. 하지만 그녀가 할당받은 직무는 일반적인 고객 상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회 경험이 전무한 그녀였건만 콜센터 내에서도 가장 험지라 불리는 이른바 해지방어팀에 배속됐던 탓이다. 아직 앳된 소녀에겐 어느 누가 봐도 버거운 직무임에 틀림 없었다.

 

 

취업 성공을 통해 소희가 누렸던 달콤함은 한마디로 찰나였다. 그녀의 일터는 일종의 전쟁터. 막말과 욕설, 심지어 성희롱성 발언을 내뱉기 일쑤인 고객들과 소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 아닌 전투를 벌여야 했다. 때로는 악다구니를 써야 할 때도 비일비재했다. 소희의 표정은 나날이 어두워져갔다. 그와 비례해 음주 빈도도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희는 평소 그녀가 잘 따르던, 비슷한 형편의 선배 태준(강현오)과의 약속을 앞두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다. 끝내 태준을 만날 수 없었던 소희.

 

 

영화 <다음 소희>는 현장실습에 투입된 특성화고 졸업반 학생이 주변의 무관심 속에서 무리한 직무로 혹사당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를 그렸다. 지난 2017년 전주의 한 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받던 여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영화의 배경이다. <다음 소희>는 제75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되었으며, 판타지아영화제 등 다수의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어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소희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은 그동안 줄곧 경찰 내 행정 조직에 몸 담아 오다 최근 일선 형사계로 발령받은 오유진(배두나)에게 배당된다. 자칫 단순 자살 사건으로 마무리될 뻔했던 소희 사건은 한 열혈 형사의 뚜렷한 소신 덕분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아직 미성년에 불과한 소희의 죽음을 어느 누구보다 안타깝게 생각했던 오유진. 그녀는 소희가 사망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이유를 어떻게든 밝혀내고자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참에 철저히 파헤치고 잘잘못을 명백히 밝혀 또 다른 피해자 발생을 막고자 했다.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심리적 부검이었다. 즉, 소희의 생전 행적을 밟고, 주변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그녀가 왜 죽음에 이르게 됐는가를 규명하려는 시도다. 

 

 

극의 전반부는 소희가 취업에 성공한 뒤 직무에 적응해 나가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렸다. 소희의 죽음 이후 왜 그녀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사건 담당 형사가 그녀의 행적을 뒤쫓으며 사건의 실마리를 차근차근 풀어가는 과정은 극의 후반부에서 다뤄진다. 

 

 

한 해 퇴사자 수가 입사자 수와 비슷할 만큼 극한의 직무 환경으로 악명이 높았던 콜센터 해지방어팀. 이곳에 배치된 소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여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하며 자신만 바라보는 담임교사와 팀장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감정을 꾹꾹 눌러담는다. 소희의 부모는 대기업에 들어간 줄로만 아는 딸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그저 잘 적응하리라고 판단, 그녀가 겪는 어려움을 미처 헤아리지 못 한다. 이렇듯 주변 어른들의 기대 어린 시선은 직무에 어려움을 겪는 소희에겐 되레 더 큰 짐으로 다가온다.

 

영화 속 학교는 교육 현장이라기보다 차라리 인력사무소에 가까웠다. 모두가 대학에 진학하려는 사회 풍조 탓에 직업계고교는 세간의 관심밖. 그러다 보니 취업률이 다음 해의 입학생 수와 인센티브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는 다시 학교의 존폐로까지 이어지게 하는 등 직업계고교에 대한 평가의 주요 가늠자 역할을 하게 된다. 교육 당국은 학교를 취업률에 의해 줄세우고, 일선 학교의 학급 역시 학급별 취업률에 의해 강제로 줄세워진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육청과 교육부로부터 하달되는 목표치를 일선 학교는 어떻게든 달성해야 한다. 학교의 생사여탈권을 쥔 교육 당국이 수치로 그들의 목줄을 꽉 움켜 쥐고 있는 탓이다.

 

교사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고충이 깊다. 교육 현장은 오로지 아이들의 취업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구조. 이런 시스템 속에서 올바른 교육이 이뤄질 리 만무했다. 극을 통해서도 드러나듯이 아이들이 전공을 살려 사회에 진출하는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교사들 스스로 교육자라기보다 영업사원이라는 자조 섞인 표현을 서슴지 않게 된 건 아주 오래 전의 일. 교사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자긍심은 온데간데 없다. 

 

 

그렇다면 현장실습생을 직접 수용하는 산업계의 분위기는 어떨까. 허드렛일이 필요한 직종에서 값싼 비용으로 인력을 마음껏 부릴 수 있으니, 어떻게든 취업률을 높여야 하는 교육 당국과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둔갑, 누구든 꺼려하는 분야로 대거 내몰리게 된다. 힘에 부친 아이들이 하나둘 그만둘 때마다 해당 업체는 다시 뽑으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행태가 일종의 관행처럼 업계에서 횡행한다. 아직 학생 신분이라는 약점을 역이용해 급여를 떼먹는 등 부조리한 행태도 여전하다.

 

이 와중에 학교는 아이들의 중도 탈락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그 방식이 지나치게 비인간적이며, 비교육적이다. 아이들의 인성 발달을 책임져야 하는 교육 현장에서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취지로 현장실습 중도 탈락자에게 주홍글씨를 아로새긴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이쯤되면 극 중 소희가 담임교사에게 어렵다고 하소연해도 어떠한 도움조차 받을 수 없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부모와 담임교사뿐 아니라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소희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고립되어 갔다. 과연 누가 그녀를 막다른 궁지로 내몬 것일까.

 

여느 또래들처럼 춤추기를 좋아했던 앳된 고3 아이가 취업을 전제로 한 현장실습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이 아이의 꿈을 짓밟은 건 무얼까. 누군가가 의도하는 것처럼 성격에 흠결이 있는 한 아이의 단순 자살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어른들과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아이 홀로 고립돼 있다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자 안타깝게 숨져간 사회적 타살일까. 영화 <다음 소희>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과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제 사회가 답해야 할 차례다. 또 다른 소희가 더 이상 없도록.

 

 

 

감독  정주리

 

* 이미지 출처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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