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그녀에겐 매춘도 숭고한 밥벌이일 뿐.. 영화 '헬로 케이티'

새 날 2022. 10. 2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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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미국 애리조나 주의 한 외딴 마을. 이곳에 자리잡은 식당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케이티(올리비아 쿡)는 어머니(미레유 에노스)와 단둘이 살아가며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녹록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늘 작은 꿈 하나를 품에서 놓지 않은 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하루빨리 돈을 모아 멋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새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근 카센터에 직원 하나가 새롭게 들어온다. 브루노(크리스토퍼 애봇)라 불리는 청년이었다. 그에게 첫눈에 반한 케이티. 비록 수줍지만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먼저 호감을 드러내는 그녀는 브루노로부터 데이트 약속을 받아낸 뒤 뛸 듯이 기뻐한다. 항상 긍정적이며 밝은 성격의 케이티와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상남자 브루노는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며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영화 <헬로 케이티>는 앙증맞은 느낌의 제목과는 달리 한 가정의 경제를 도맡은, 소녀가장격인 여성이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며 경험하게 되는 잔인한 현실을 그린 일종의 잔혹극이다. 케이티는 경제적 약자라는 신분 덕분에 운신의 폭이 매우 좁지만, 그럼에도 늘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는 그녀가 겪게 될 어처구니없는 사건들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장치 가운데 하나라 씁쓸함을 자아내게 한다.

 

케이티는 기껏해야 20대 초반일 정도로 아직은 앳된 여성이다. 그렇다면 케이티의 어머니 역시 경제 활동이 가능한 연령대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장의 역할을 케이티에게 오롯이 맡긴 채 집에서 빈둥거리거나 쓸 데 없는 일로 소일하곤 했다. 돈의 씀씀이도 컸다. 케이티는 이 철없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쉼없이 일해야 했다. 하지만 밤낮 없이 일을 해도 그녀의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많지 않았다. 

 

 

결국 케이티는 뭇남성들에게 몸을 팔기 시작한다. 식당 일을 하는 짬짬이 그녀의 몸을 원하는 남성들에게 맡기고 그의 대가로 돈을 받는 방식이었다. 브루노를 사랑하게 된 이후에도 케이티의 매춘 행위는 멈추지 않는다. 그녀에겐 식당 일처럼 매춘 역시 그저 단순한 돈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달이 발생하는 건 그즈음이다. 케이티가 매춘 행위를 일삼는다는 건 마을 남성들에겐 이미 공공하면서도 널리 알려진 사실 가운데 하나. 결국 이 소식은 브루노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가게 된다. 격노하는 브루노. 케이티는 이런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유하기 위해 애쓴다.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을까.

 

 

영화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민낯을 케이티가 몸소 겪게 되는 현실을 통해 스크린 위에 옮긴다. 냉혹하고 안쓰럽다는 단어 외에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영화 <헬로 케이티>는 리얼하다. 우리 사회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경제적 약자들의 고달픈 현실이 케이티로부터 겹쳐 보이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결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늘 주변에 감사함을 전파하고, 상대에게 행복을 기원하던 케이티의 고운 심성이 그래서 되레 안쓰러울 뿐.

 

월세를 독촉하는 집 주인, 한 달동안 어렵게 일을 해 마련한 월세를 흥청망청 써버린 뒤 나 몰라라 하는 어머니.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케이티는 오로지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매몰되어 그 외의 것들을 미처 생각하거나 돌볼 겨를이 없다. 주변 사람들은 몸을 파는 그녀를 향해 창녀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르지만, 케이티에겐 매춘조차 그저 숭고한 밥벌이 가운데 하나다. 그 어떤 가치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만큼 생계가 급박하다는 의미다.

 

 

케이티는 밤낮 없이 열심히 일을 하는 데도 왜 매춘 행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까. 이를 과연 개인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사회 시스템으로 들여다볼 여지는 없는 걸까.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부의 쏠림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고, 그럴수록 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시스템이 더욱 공고해져야 하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영화 <헬로 케이티>는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한 여성의 고군분투를 통해 우리 사회에 되묻는다.

 

더불어 영화는 경제적 지위에서 비롯된 힘, 그리고 피지컬의 우위를 앞세운 남성들의 폭력성도 함께 고발한다. 여성의 육체를 탐하는 행위를 마치 전쟁터에서 주워온 전리품마냥 여기며 행동하는 남성들의 폭력성은 한때 케이티를 가르치던 선생님도, 범죄로부터 마을을 수호하는 경찰관도, 케이티의 아버지뻘되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도, 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은 점잖은 손님들도 모두가 예외일 수 없다. 양의 탈을 쓴 늑대 앞에서 경제적 약자이자 여성은 그저 만만한 먹잇감이자 희생양에 불과하다.

 

순진하며 긍정적이고 쾌활하기까지 한 케이티가 약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수모와 아픔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이 된다. 감정이입 덕분에 그녀가 짓밟히고 철저하게 무너져내릴 때 관객의 감정도 동시에 바닥 아래로 푹 꺼지는 듯한 동병상련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안타깝고 안쓰럽지만 달리 손 쓸 방법이 없으니 더 답답할 따름이다. 다만,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찬 그녀이기에 언젠간 지금의 고난을 딛고 훨훨 날아오르리라는 작은 희망으로 위안 삼아본다. 

 

 

감독  웨인 로버츠   

 

* 이미지 출처 : 라비앙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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