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엘리트 체육 시스템의 굴레, 스포츠 폭력

새 날 2020. 8. 8.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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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유독 운동을 좋아했던 철인3종경기 유망주 최숙현 선수. 그녀가 지난 6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최근 국회 청문회를 통해 공개된 그녀의 일기장에는 지난 3년간 그녀가 당했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좋아하던 운동. 이를 그만둘 각오로 피해를 호소했으나 정작 그녀에게 돌아온 건 차디찬 외면과 좌절뿐. 


지난 8일 방송된 SBS <뉴스토리> ‘엘리트 스포츠 왕국의 그늘’ 편에서는 폭력 피해를 호소하던 20대 스포츠 유망주는 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그 배경과 스포츠 폭력의 구조적인 문제점, 그리고 대응책에 대해 집중 취재했다.



최숙현 선수는 경주시청 입단 이후 잦은 폭력에 시달려왔다. 그녀에게 가해진 폭언과 폭행은 3년 동안 지속됐다. 의사로 속인 뒤 팀 닥터로 일해 온 운동처방사가 폭력을 행사했고, 감독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최 선수가 공황장애 치료를 받는 등 신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어했다. 고 최숙현 선수의 아버지 최영희씨는 “걔들이 갑이면 부모는 졸이다. 자식이 피해볼까 싶어 아무 말도 못한다”고 하소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었다는 최 선수. 여기에 감독의 지속적인 회유까지 더해지면서 팀을 부산시청으로 옮긴 뒤인 지난 2월에야 경주시청과 협회에 폭행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조재범 전 코치 사건을 계기로 인권위에 만들어진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과 대한체육회 인권센터 등에도 차례로 진정을 냈다. 경찰 문도 두드렸다. 그러나 사건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데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간 스포츠 폭력


대한철인3종협회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으며, 대한체육회 인권센터 역시 대면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경주시청은 전지훈련 중인 가해 선수를 쏙 빼놓고 경주시청을 거쳐 간 일부 선수들과 전화통화만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폭행이 심각하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취재진의 확인 결과 이마저도 해당 선수들은 보고서에 기록된 경주시청과 통화한 적도, 진술한 적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들 역시 피해자였지만 경찰의 소극적인 반응에 고소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 경주시청 선수 A씨는 “가슴과 뺨을 여러 차례 맞으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며 “제가 당한 걸 말하려고 하니까 ‘본 것만 들어가고 제 것은 안 들어간다’고 했다”고 주장한다. 선수 B씨는 “처벌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벌금 20~30만 원으로 끝난다’고 하여 도저히 용기를 낼 수 없었다”고 말한다. 


경찰은 최 선수의 폭행을 경미한 사건으로 판단,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때문에 경찰 조사 뒤 더욱 힘들어했다는 최 선수. 


강희창 전 철인3종경기 선수는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을 때마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며 “‘자기가 진술한 사항에 대해 사소한 취급을 받아 너무 지친다’는 말을 했다”고 말한다.


반면 감독은 경주시청 동료 선수들에게 최 선수를 때린 적이 없다는 진술서를 써서 경찰에 제출하도록 종용했다. 폭행 증언을 약속한 선수들에게는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렇게 최 선수는 점점 고립돼 갔다. 그녀의 당시 심경은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확인된다. 


친구 김아무개씨는 “‘나 빼고 다 정상인 건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많이 힘들어 했다”며 “‘분명 내가 겪는 게 사실인데 왜 다들 아니라고 하는지, 왜 다 부인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말한다. 지속적인 폭력과 폭언에 노출된 최 선수. 그럼에도 어느 누구에게조차 도움을 구할 수 없었던 현실. "무섭고 죽을 것 같다.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 달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 채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다.


최 선수의 사망 이후에도 폭행 사실을 부인해온 가해자들. 운동처방사는 혐의를 인정한 뒤 구속됐고, 국회에서 때린 적이 없다고 증언한 김 감독과 주장 선수도 결국 구속됐다. 스포츠 공정위는 가해 사실을 뒤늦게 밝힌 김도환 선수에게 자격정지 10년을, 김 감독과 주장 선수에게는 영구제명의 징계를 확정했다. 대한철인3종협회는 회장이 사퇴하고 관리단체로 지정됐다. 하지만 부실수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경찰과 경주시청, 경주시체육회 그리고 대한체육회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이번 사태가 제대로 정리 안 되고 여전히 꼬리 자르기 방식으로 일관한다면 선수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명확해진다”며 “해도 안 되고 앞으로 이런 거 안 하겠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게 더 무섭다”고 주장한다. 


최숙현 선수의 극단적 선택 이후 경주시청과 협회가 사건을 축소하려 한 정황은 뚜렷하다. 취재진이 지난달 2일 열린 경주시청 운영위 회의록을 확인한 결과, 위원들은 가해 감독과 선수를 부른 뒤 폭행 사실 확인 없이 숨진 최 선수의 정신 상태만을 주로 거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한철인3종협회 역시 동료 선수들을 상대로 입단속에 나선 정황이 포착됐다. 


감독이 동료 선수들에게 허위 진술 회유에 나서고, 진정이나 고소장이 접수된 뒤에도 제대로 된 현장 조사나 확인 절차 없이 폭력 사건에 눈 감기 바쁜 체육계. 엘리트 스포츠 단체의 카르텔이 사건 축소에 힘을 발휘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가운데 이렇게 또 한 명의 스포츠 유망주가 스러졌다. 



엘리트 스포츠 육성 시스템의 문제점


대한체육회장은 팀킴과 조재범 전 코치 사건 이후 엄정한 대응을 약속했지만 이 또한 말뿐이었다. 최숙현 사건 이후 발표한 대한체육회의 ‘스포츠 폭력 추방 특별조치’ 대부분은 지난해 내놓은 내용의 재탕 수준이다. 


국회 처리가 늦어지면서 지난 5일부터 활동에 들어간 스포츠윤리센터. 하지만 스포츠 폭력 초기부터 관련 단체가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배타적 조사권과 징계권이 없어 일각에서는 조사에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문경란 전 스포츠혁신위원장은 “인적 카르텔이 형성돼 있는 배경 속에서 카르텔의 사슬을 끊지 않고 진상규명은 안 되거니와 앞으로도 제2, 제3의 사건을 예방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정부와 대한체육회는 지난해 1월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의 성폭력 사건 이후 폭력 근절 대책을 내놓았다.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민관 합동 스포츠 혁신위가 구성됐고, 주중대회 폐지 등 선수들이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향 전환 방안도 마련됐다. 성폭력과 폭력 사건을 막기 위한 권고안도 제시됐다. 그러나 스포츠 폭력이 여론의 관심 영역 밖으로 밀려나자 체육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현실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은 지도자가 선수의 진로를 좌우하는 탓에 폭력 피해가 발생해도 쉽게 나설 수 없는 한계점이 분명하다. 폭력의 대물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도자 앞에서 선수와 부모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저 묵묵히 인내해야 했던 건 결국 선택권이 없는, 외길인생을 강요받는 이러한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이 갖는 구조적 문제점 때문이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 참가하여 메달 색상과 숫자로 국력을 과시하던 시대는 저물었다. 선수들의 인권이 국위선양에 앞서 고려돼야 하는 시대이다. 대한민국 체육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득권 보호에 혈안이 된 카르텔의 사슬을 끊고 성적 지상주의의 엘리트 스포츠 육성 방식이라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 진정 새로운 시스템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지금 동구권 어디를 가도 이런 식으로는 안 하고 있다. 막 합숙하면서, 때려가면서, 욕하면서 운동시키고 또 운동을 안 할 경우 다른 방법이 없는, 옵션이 없는 이런 식의 외길인생을 살게 하는 이런 시스템은 유효가 다했을 뿐 아니라 지금 2020년 대한민국에 전혀 맞지 않는다.”(정용철 교수)



* 이미지 출처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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