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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 남과 북을 담다

새 날 2019. 10. 1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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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관객 580만 명을 동원하여 당시로서는 폭발적인 흥행 성적을 거둔 작품이다. 대립과 긴장 그리고 금단의 땅이기도 한 비무장지대, 영화는 이곳에서 형제처럼 지내는 남북 병사들 간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2000년대 들어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들은 다양한 소재와 관점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과거 시대와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바로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놓인 작품이기도 하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100년, 그리고 한국영화가 시작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한국영화가 대한민국 100년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셈인데, 12일 방송된 SBS <뉴스토리> ‘한국영화 100년, 남과 북을 담다’ 편에서는 분단시대의 우리 모습이 스크린 위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그려지고 있으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살펴보았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은 영화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상을 허용하지 않았던 시대에 질식할 것 같은 감정이 있었다. 그 체제의 문제는 문제대로 인지하면서 거기에 사는 보통사람은 똑같은 감정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다. 그걸 한 번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었다.” 


심재명 영화 제작자는 “영화 촬영 때는 서해교전이 일어났다. 촬영을 하면서 감독하고 저희도 과연 이 영화가 제대로 완성해서 개봉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며 영화 제작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촬영을 끝내고 개봉을 불과 석 달 앞둔 2000년 6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나라가 마케팅을 해줬다. 그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이렇게 역동적으로 우리 현대사, 시대가 변하는 와중에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 


결과적으로 볼 때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바라는 시대적 열망이 영화적 상상력과 극적으로 조우한 셈이다. 관객들은 이런 영화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며 호응해주었고, 이후 분단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는 과거에 비해 다양성을 추구하며 공감대를 더욱 넓혀가게 된다. 


한국영화, 어떻게 진화했나


그렇다면 한국영화는 어떻게 진화해 왔을까?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곳은 단성사인데, 방송에 따르면 경남 합천 영상테마파크에 가면 일제강점기 단성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단다. 서울 종로에 있던 원래의 단성사는 현재 고층 상업 건물로 바뀌어 더 이상 영화관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한편 추억으로 남은 필름영화는 2013년 개봉한 영화 <설국열차>가 마지막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디지털 영상파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섰던 장면은 1998년 복합문화상영관인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함께 모두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더불어 분단시대를 다룬 영화도 시대에 따라 변천을 거듭해오고 있다. 



방송에 따르면 1960~70년대 대부분의 분단영화는 관제 반공 영화였다. 당대 최고 배우들이 열연한 영화 <피아골>이나 <돌아오지 않는 해병>, <빨간 마후라> 등 손에 꼽히는 전쟁영화들은 하나같이 남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시각이나 애국적 영웅주의를 담고 있다. 특히 1965년 개봉한 영화 <7인의 여포로>는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이만희 감독이 구속되는 사건이 빚어지기도 했다.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전영선 교수는 이에 대해 “금기와 검열이라고 하는 그 기제가 작동됐던 시대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며 “영화라고 하는 것이 문화이기도 하지만, 사회를 반영하는 시대의 창이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제작 환경이나 여건에서 정치적 상관성을 가지고 영화가 제작됐다.”고 말한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은 검열의 시대다. 수원대 김효정 영화영상객원교수는 “유신정권 이후 4차 영화법 개정이 일어난다. 이중검열이라고 하여 시나리오 단계에서 한 번, 영화를 찍어놓고 한 번, 이런 식으로 두 번 하겠다고 얘기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이 원할 경우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검열했다.”며 “그런 상태에서 1970년대에 좋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기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렇다면 신군부 집권기인 1980년대는 어땠을까?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그때 나왔던 영화들 대부분이 <O양의 아파트>, <산딸기>,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등인데, 영화감독들이 갈 데가 없었다.”며, “뭔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 또는 에로티시즘 이런 쪽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탓에 1980년대는 분단영화 그 자체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정신은 죽지 않고 어디선가 여전히 살아 숨을 쉬고 있었다. 이념대결의 허무함을 그린 1980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짝코>나 지리산 빨치산을 사상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1990년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부군>이 바로 그러한 사례다. 


<남부군>으로부터 정확히 9년 뒤인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영화 <쉬리>는 남과 북을 연인 사이로 발전시키는 과감함을 선보인 작품이다. 그동안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와는 결이 전혀 다르다. <쉬리>는 당시 최고 기록인 620만 명의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였다. 직전 최고 기록인 <서편제>의 103만 명을 무려 여섯 배나 뛰어넘는 놀라운 수치다. 이 영화는 총 제작비 32억 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작 규모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분단영화는 <쉬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이념이 자유롭고 사회가 개방되고 미래지향적인 사회가 됐을 때 영화가 좋아진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처럼 1999년 <쉬리>,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의 잇따른 도전은 우리 사회의 금기를 깨고 사고의 확장을 가져오는 일등 공신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분단영화가 흥행하는 이유


그렇다면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록들이 유독 분단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방송에서는 분단영화의 흥행은 민족 비극의 역설이라고 주장한다. 평소엔 잊고 지내고 있지만, 잠재된 분단의 아픔이 폭발적인 정서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신드롬이라는 것이다. 


2003년 12월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 마침내 천만 관객 시대를 연 작품이다. 1960~70년대 인권을 저당 잡힌 채 살인병기로 길러진 북파 공작원들의 실제 이야기를 그린 <실미도>는 미처 몰랐던 분단역사의 이면을 스크린에 옮겨 공감을 이끌어냈다. 실미도에 이어 2004년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 역시 천만 관객을 기록한 작품이다. 산업화시대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2014년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은 1400만 관객을 끌어 모았다. 해운대에 이어 윤제균을 2천만 감독으로 만들어준 배경에도 다름 아닌 민족분단이 있었던 셈이다. 


최근의 분단영화는 남과 북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 전쟁 영웅 만들기 같은 천편일률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이산가족과 탈북민, 그리고 남북단일팀, 최근에는 북한 핵 등 소재도 다양해졌다. 방송에 따르면 변호인으로 천만 감독 대열에 합류한 양우석 감독의 2017년 영화 <강철비>는 두 가지 시도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하나는 북한 핵의 등장이고, 다른 또 하나는 한반도 문제를 더 이상 남북관계로만 바라보지 않고 국제관계로 확장한 대목이다. 


분단영화는 이렇듯 날이 갈수록 남북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성찰로 진화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시대적 상황과 정치권력에 의해 왜곡되는 사례도 빈번했다. 이념보다 경제가 상위 개념으로 작동했던 이명박 정부에는 분단영화도 상업화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연평대전>, <인천상륙작전> 등 과거 안보영화시대로 회귀하는 게 아닌가 하는 평단의 우려가 높았다. 



100년을 맞이한 한국영화. 영화란 예술적인 측면 외에도 사회와 시대를 반영하는 창이 되어주기도 한다. 때문에 한국의 분단문제는 우리 영화 발전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자 영화 산업의 발전을 이룬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양적 성장 뒤에는 어두운 그늘도 있기 마련이다. 어느덧 100년을 지나 새로운 100년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영화, 이장호 한국영화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장의 따끔한 쓴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할 때다. 


“산업적으로는 상당히 성장했다. 오직 흥행 위주로 영화를 만드는 시대가 지금이다. 그만큼 잃는 것이 많다. 영화에서 작가정신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남는 게 없는 그런 영화들로 이어지고 있다”



* 이미지 출처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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