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딜레마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나 '킬링 디어'

새 날 2019. 9. 22.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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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인정받고 있고 사회적 명성까지 두루 얻으며 성공한 외과의사로 승승장구하는 스티븐 머피(콜린 파렐). 그의 곁에는 아내 안나(니콜 키드만)가 있으며, 딸 킴(래피 캐시디) 그리고 아들 밥(서니 설직)과 함께 이상적인 형태의 가정을 꾸리며 살아오던 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스티브 주변에는 한 소년이 맴돌기 시작한다. 마틴(베리 케오간)이라 불리는 소년이었다.


마틴은 틈만 나면 스티븐을 만나기 위해 직장은 물론이며 집까지 찾아왔다. 언뜻 어눌한 구석이 엿보이는 마틴이었지만, 그는 의외로 집요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든 귀찮아할 법한데, 스티븐은 어쩐 일인지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한 느낌이다. 아니 마틴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림직하다. 스티븐은 마틴에게 값비싼 손목시계를 선뜻 풀어준다거나 마틴의 집에 방문하는 등의 의외의 행동을 취하곤 한다.



심지어 마틴을 집으로 초대해 그를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게도 해준다. 이런 와중에 킴은 마틴과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마틴은 점차 스티븐에게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더니 급기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렇다. 마틴은 스티븐의 의료 과실로 숨진 환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스티븐에게 가족 중 한 명을 죽이지 않으면 가족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후 아들과 딸이 실제로 사지 마비 증상과 거식증을 보이자 스티븐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제 가족을 죽였으니 선생님 가족도 죽여야 균형이 맞겠죠?" 섬뜩한 마틴의 저주. 딜레마에 빠진 스티븐은 이 상황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영화 <킬링 디어>는 성공한 심장 전문의 스티븐이 그에게 다가온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 마틴과 친밀해진 뒤, 스티븐 가족이 겪게 되는 기이한 현상과 더불어 누가 보아도 이상적이었던 그들의 삶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내용을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작품이다. 


원제는 <The Killing of a Sacred Deer(신성한 사슴 죽이기)>이며,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트로이 전쟁으로 원정을 떠난 아가멤논이 신의 사슴을 죽여 저주를 받게 되자 이 저주를 풀기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는 내용이다.



마틴의 저주대로 스티븐이 가족 중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 마틴은 의료 과실로 숨진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스티븐과 그 가족들을 극한의 딜레마에 몰아넣은 채 선택을 강요하게 된다. 이때 마틴은 흡사 신의 지위로 올라서기라도 한 양 심판자로서의 태도를 취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이 끔찍한 딜레마에 대한 연출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극단적 상황에 처한 인간의 본능을 보고 싶었다.” 



스티븐은 이성이 마비되어 극도의 패닉에 빠져들게 되고, 그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맞닥뜨리게 된 불행을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부터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 양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갑자기 착한 아들이 되거나 말 잘 듣는 딸로 둔갑하고, 아내는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며 속삭인다. 이들 가운데 희생자를 골라야 하는 스티븐. 물론 끔찍한 딜레마임이 분명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때 그가 벌이는 행위는 경악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딜레마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인간의 민낯이란 실로 이기적인 데다 지극히 잔인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영화 <킬링 디어>는 제70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였으며,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통해 주목받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처음에는 어리숙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로부터 점차 포독스러운 면모를 밖으로 들춰내게 되는 베리 케오간의 연기는 단연 압도적이었으며,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스티븐 역의 콜린 파렐과 안나 역의 니콜 키드먼의 연기 또한 흡족하다. 고막을 찢을 듯 증폭된 사운드는 불안을 고조시키고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딜레마 앞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린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다. 비극과 맞닿은 딜레마, 이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인간이 우리가 믿고 있던 면모들을 버리고 인간답지 못한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어떤 스릴러보다 더 잔혹하고 섬뜩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 이미지 출처 : 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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