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킹메이커로 강요당해온 한 여성의 삶 '더 와이프'

새 날 2019. 2. 22. 13:17
반응형

* 주의! 이 포스팅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더 와이프>에서 작가인 조셉(조나단 프라이스)에게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조셉은 아내인 조안(글렌 클로즈)과 함께 뛸 듯이 기뻐한다. 조셉 부부는 아들 데이빗(맥스 아이언스)과 함께 노벨상 시상식 참여를 위해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향한다.

영화 <더 와이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작가와 오로지 그의 성공만을 위해 평생을 뒷바라지해온 아내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2003년에 출간된 메그 울리처의 동명 소설이 이 영화의 원작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남편, 그와 아내 사이에 얽힌 놀라운 비밀

작품에서 열연을 펼친 글렌 클로즈는 곧 개최될 제91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으로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은 물론, 아카데미상의 가늠자로 읽히는 미국배우조합상(SAG)의 여우주연상도 수상했다.



글렌 클로즈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품 여배우로 주목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아카데미상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던 배우이다. 이번 수상 도전이 벌써 7번째다. 그녀의 수상 여부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건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함께 탑승하는 등 노벨문학상 시상 이벤트에 참여하는 일정 내내 조셉 부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조셉의 전기 집필을 담당하는 작가 나다니엘(크리스찬 슬레이터)이었다. 조셉은 무언가 자신의 뒤를 캐는 듯한 느낌 때문에 그의 등장을 몹시 탐탁지 않아했다. 조셉에게는 밝히기 곤란한 비밀 같은 게 숨겨져 있었던 걸까?



실제로 나다니엘과 조안의 개인적인 만남이 성사되면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거장의 불편한 뒷이야기가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노벨상 수상자 선정으로 마냥 들떠있던 남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분함을 유지하던 조안의 마음도 나다니엘과의 접촉 이후 평정심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반평생을 함께해온 조셉과 조안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화는 스톡홀름에서의 노벨상 시상식 일정을 소화하는 조셉 부부의 현재 모습과 과거 결혼하기 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교차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조셉과 조안 두 사람의 인연은 사제지간으로 싹텄다. 유부남이었던 조셉 교수 밑에서 공부하던 조안이 그와 사랑에 빠져 결국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문학도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특히 조안의 실력은 출중했다. 다만,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950~60년대에는 성차별이 두드러지는 바람에 여성이 문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문학을 좌지우지하는 출판사 시장을 모두 남성들이 지배하고 있던 시절이라 여성들은 제아무리 실력이 탁월해도 묻혀버리기 일쑤였다.



조안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조셉의 문학 실력은 조안에 비하면 훨씬 초라한 것이었다.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출세를 하려면 조셉에게 재능이 부여되었어야 하는데, 무언가 균형이 맞지 않은 셈이었다. 조셉과 조안이 선택한 건 결국 타협이었다. 실제로 글을 쓴 건 조안이었으며, 이를 조셉의 이름으로 작품을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킹메이커’로 강요당해온 여성들의 삶

이 작품을 보고 있자니, 여성의 사회 참여 활동이 백안시되었던 시절이라 섣불리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여성 마가렛이 자신보다 그림 실력이 월등히 떨어지는 남성 월터 킨의 이름으로 작품을 내보내면서 그로 하여금 명성과 돈을 거머쥐게 했던, 비슷한 시대적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빅 아이즈>가 오버랩된다.



한편, 아들인 데이빗은 자칫 단조로울 수도 있었던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는 문학계의 거장으로 우뚝 선 아버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함께 참여하면서도 왠지 거북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니 얼굴은 온통 불만투성이였다. 아버지를 따라 문학의 길로 들어선 그가 쓴 작품을 아버지가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았던 데다가 아버지 조셉이 평소 자신을 못 미더운 듯 밖으로 드러내던 태도 때문이었다.

데이빗은 행사 일정 내내 어깃장을 놓으면서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놓는 경우가 많았으며, 조안이 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후한 인심과 평가를 하면서도 유독 자식에게만큼은 잘 베풀지 못하는 보편적인 부모와 자녀 사이의 정서를 고스란히 옮겨온 듯하여 더욱 실감나는 장면들이었다.



과거의 조안 역을 맡은 배우는 글렌 클로즈의 친딸 애니 스털크였으며, 조안의 아들인 데이빗 역은 유명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의 2세인 맥스 아이언스가 담당했다. 엄마와 딸, 그리고 또 다른 배우 2세가 등장, 세대를 넘나드는 연기 대결을 펼치는 대목도 흥미롭다.



남편 조셉은 아내 조안의 일방적인 희생 덕분에 문학적 명성을 높여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조셉은 평생 동안 조안의 속을 썩여왔다. 그는 한창 젊은 시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뭇 여성들을 향한 편력이 심했다. 이를 묵묵히 감내해온 조안이 존경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영화는 여성의 역할을 그저 ‘킹메이커’로 강요해온 당시 사회상을 바탕으로 조안의 삶을 묵묵히 그려나간다. 묵직한 글렌 클로즈의 배역 안에는 조안이 그동안 흘렸을 눈물과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녀의 깊은 연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렇듯 글렌 클로즈의 연기에 힘이 느껴지던 배경에는 여성의 또 다른 이름인 모든 어머니들의 고단함과 노고가 깃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됐던 당시와 비교하면 여성의 성역할과 사회 참여는 눈부시게 변화했음을 실감케 된다. 오늘날 여성들이 지금과 같은 권리를 누리게 된 배경에는 조안, 그리고 영화 <빅 아이즈>의 마가렛과 같은 앞선 세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지난한 노고가 있었음을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감독  비욘 룬게 


* 이미지 출처 : ㈜팝엔터테인먼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