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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10년, 아직 끝나지 않은 비극 '그것이 알고 싶다'

새 날 2019. 1. 2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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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1월 20일 용산역을 마주 보고 있던 용산 4구역 남일당 4층 건물 옥상에 망루를 설치하고 점거 농성을 벌이던 농성자 5명과 이를 제지하던 경찰특공대 소속 경사 한 명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숨졌다. 이른바 용산참사다.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이라는 논란이 일었으나 적법한 집행이었다며 법원은 경찰의 손을 들어줬고, 그렇게 용산참사는 마무리됐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지났다. 19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이 용산참사를 조명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혹, 무리한 진압 누구의 책임인가


아버지 이상림 씨와 함께 사건 당시 망루에 올랐던 이충연 씨는 그날 아버지를 잃고 혼자 살아 돌아왔다. 그런 스스로가 늘 죄송스럽다는 이 씨, "내가 당황해서 혼자 떨어지지만 않고 손이라도 잡고 같이 떨어졌으면... 아버님은 자식은 네가 왜 잘 챙기지 못했느냐 원망도 하실 수 있는데. 죄송스러울 때가 있다."고 말한다.



농성 진압을 위해 출동했다가 망루 1층 계단에서 죽음을 맞이한 경찰특공대 김남훈 경사의 아버지 김권찬 씨는 "왜 얘만 1층에서 못 나온 건지. 경찰은 얘기도 안 해주고 비밀로 덮고 안 해준다. 솔직히 똑같이 올라간 사람 다 나왔는데 왜 아들만 못 나왔는지 지금도 숙제다"고 호소한다.



사건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망루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던 농성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형 크레인이 동원됐고, 콘테이너를 투입시켜 특공대원들을 망루로 들여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망루 1층에서 화염이 치솟으면서 불은 삽시간에 망루 전체를 집어삼켰다.

방송은 그날 경찰의 작전에는 무리가 없었으며 온당했는지 그리고 작전을 명령한 최종 지휘 책임자는 누구였는지를 파헤쳤다.

당시 현장에 투입된 다른 특공대원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망루로 들어섰을 때 내부엔 이미 인화성 물질로 인한 냄새가 자욱하여 좋지 않은 기운이 가득했단다. 뿐만 아니다. 참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1월 19일에 작성된 경찰의 작전 계획서에는 망루 안에 20L의 시너 60개가 있다는 내용이 버젓이 적혀있었다. 지휘관들은 시너 등 인화물질이 있다는 위험한 상황임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당시 작전을 지휘하고 망루 진압을 승인한 책임자는 누구였을까? 취재진은 특공대 투입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용산경찰서장을 만나 그날의 상황을 물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당시 서울경찰청 경비부장은 뭐라고 했을까? "특공대원들이 스스로 제압할 수 있다는 공명심에서 그런 것 같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현장을 지휘했던 김수정 당시 서울청 차장은 재판에서 "전체를 조망할 뿐 세세하게 명령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사건 직후 벌어진 무리수


모두가 책임이 없다며 발뺌하는 현실, 취재진은 경찰특공대 투입을 최종 승인한 이 사건의 실질적 책임자인 김석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을 찾았다. 국회의원이 된 그는 "경찰의 법 집행은 정당했다고 믿고 있다. 민간인 조사위원들의 판단이 대법원 판단 위에 있냐"고 말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5명의 민간인과 1명의 경찰을 사망케 한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망루를 세우고 이를 지킨 사람들은 몇 년씩 옥살이를 했지만, 정작 망루를 무너뜨린 경찰은 책임을 진 사람이 아무도 없잖은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이 사건, 과연 온당한가?


사건 이후 벌어진 일들 역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천지였다. 망루 건너편에서 망루를 향해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렸던 일군의 사람들은 당시 의경 제보자에 따르면 모두 용역으로 밝혀졌다. 현장에 경찰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하나 이들을 제지하는 이가 없었다. 사실이라면 엄연한 불법 행위이다.



사건 직후 작성되어 공개된 경찰청 내부 문건은 더욱 황당하다. 당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가 직원 공감대 형성과 여론 조성 등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의 공권력이 정당했다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직원들을 동원, 댓글을 달게 하는 등 최초의 댓글 부대 역할을 그가 톡톡히 한 것이다. 강호순 사건 등 당시 일어난 강력범죄를 활용, 물타기를 했던 정황도 드러났다. 유족들의 동향을 판단한다는 명분으로 유족들을 감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은 경찰의 진압 방식은 치밀하게 준비되지 않은 무리한 요소들이 많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위법한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판단을 내려 어느 누구에게도 참사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판결문에는 경찰의 잘못이 적혀있지만 업무상 실수일 뿐 범죄 행위는 아니라고 직시하고 있다.

용산참사 10년, 아직 끝나지 않은 비극

참사 1년 뒤 남일당 건물은 결국 철거됐다. 4층짜리 건물이 있던 이곳은 지금 30∼40층에 이르는 주상복합 빌딩 6개 동 신축공사가 2020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에 있다. 이는 용산 '00캐슬'로 불리며 높은 몸값을 자랑한단다.



용산참사 이후 10년, 당시 철거민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부근에서 복집을 운영하던 사장은 남편 사망 후 호떡 장사를 하고 있었다. 금은방 사장은 아파트 건물 관리인이 됐다. 또 다른 누군가는 실업자가 됐으며,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사람도 더러 있었다.

2018년 9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용산참사 당시 경찰이 안전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진압해 인명 사고를 불러온 데 대해 용산 유가족들과 순직한 경찰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이어 지난 1월 14일, 민갑룡 경찰청장은 용산참사 이후 처음으로 경찰 조직의 변화와 적절한 시기에 사과할 것을 약속했다.



방송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의 부동산은 상위 1%가 전체의 46%를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산참사 이후 변한 것이라곤 도시정비법상 영업 손상 보상비를 3달에서 4달치로 늘린 것뿐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건물 없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세입자들이 건물에서 밀려나는 비극은 비단 남의 일만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얘기다.

10년이 지났음에도 용산참사를 둘러싼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사과도 없었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산하 진상조사단 내 용산 참사 사건 조사팀이 조사를 시작했지만, 참사 당시 담당 검사들의 조사 거부와 압력으로 인해 진전이 없는 실정이다. 5명의 민간인과 1명의 경찰을 희생시킨 화재는 어떻게 일어난 것이며, 경찰은 왜 무리하게 진압을 강행한 것인지, 아울러 참사의 빌미가 됐던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은 다른 사례와 달리 왜 그토록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인지.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다. 1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 이미지 출처 : POOQ(푹) 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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