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세계를 만드는 방법

새 날 2018. 12. 2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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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왠지 이맘때의 날씨가 연상된다. 온통 잿빛투성이다.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그렇다기보다는 일조량이 연중 가장 적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낮은 기온이 암울한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느낌 때문인 듯싶다. 작가의 필치는 날카롭다 못해 서슬이 퍼렇다. 물론 사회적 약자를 향한 시선은 그와 반대로 따스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말이다.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글의 양식인 '서사' 예술 계통의 작가라 그런 것일까? 손아람은 얼마 전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2009년 용산참사를 모티프로 한 소설 '소수의견'을 쓴 작가다.


작가의 관심 영역과 세계관은 그 폭이 워낙 넓다. 그만큼 우리 사회를 향한 애정 역시 남다르다. '세계를 만드는 방법'은 작가가 그동안 여러 종류의 시사 매체에 연재했던 칼럼들을 한데 모아놓은 책이다. 덕분에 정성스레 펼쳐놓은 작가의 사유를 하나씩 길어올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그가 세상사에 대해 날카롭게 일침을 가한 글들의 작성된 시기를 거들떠보니 가장 멀리는 2010년, 가장 가깝게는 바로 올해다.



이 시기는 우리 사회가 정치적인 격변에 휩쓸렸던 때다. 물론 언제 시끄럽지 않았던 적이 단 한 차례라도 있었느냐며 힐난한다면 반박하기가 쉽지 않은 노릇이지만 말이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은 현재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일깨웠던 촛불혁명으로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였고, 어느덧 집권 3년차를 향해 가는 중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근래 데드 크로스를 기록했다. 아무리 큰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된 대통령이라고 해도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에서는 응당 겪는 일이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젊은 계층의 최근 비토는 조급증을 드러내는 듯싶어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작가도 언급하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 시절, 청년들은 우리나라를 향해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으로 스스로를 깎아내려야 했다. 부모보다 못사는 유일한 세대라는 호칭에 걸맞게 노동시장 등 모든 삶의 여건이 구조적인 모순을 토해내던 시기였다. 이러한 청년들의 아우성은 박근혜 정부를 끌어내린 촛불혁명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들어선 문재인 정부, 앞선 정부와 달리 많은 부분에서 개선하려는 의지가 뚜렷하다. 정책적 혜택을 기업에 몰아주어 낙수효과를 기대했던 지난 정부와 달리 서민들의 소득을 늘려 소비를 진작시키고 이를 마중물 삼아 경기를 살리겠다는 소득주도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최저임금 인상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경제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모두들 아우성이다. 당연한 결과 아닌가? 이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이 대통령 단 한 명 바뀌었다고 하여 단박에 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눈에 띄는 정책적 효과가 드러나려면, 특히 경제 영역이라면 더더욱 일정 시간이 지나야 함을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작금의 경기 불황은 우리 경제가 아직도 지난 정부 정책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적폐세력들의 정권 흔들기가 점입가경에 이르고 있고, 노선이 다른 또 다른 진보 진영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며 마찬가지로 정권 흔들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적폐세력들의 훼방이야 원래 직업적인 행위이기에 일견 이해가 가는 대목이지만, 집권 2년차에 불과한 현 정권에 자신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생떼를 부리는 일부 진보 진영의 행태는 자꾸만 노무현 정권 시즌2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의 표현처럼 물론 이 세계는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 비록 느린 걸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음은 자명하다. 작가는 2010년, 전태일 사후 40주기를 맞이하는 글을 통해 여전히 열악한 노동자들의 삶을 언급하고 있으나, 최근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로 인해 목숨을 잃었듯이 노동자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 2011년 크레인 위에서 309일 동안 고공 농성을 펼쳤던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의 사연은 '일자리를 되돌려달라'며 굴뚝 위로 오른 파인텍 노동자들에 의해 최장기 고공농성 기록이 갱신되면서 어느덧 무색해지고 말았다. 12월 25일로 벌써 409일째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볼 때 작가가 '절망의 세계를 마주하는 방법'이라는 장을 통해 언급한 절망적인 세계로부터 현실은 어쩌면 단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잿빛 세상이 연상됐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는다. 작가가 자신의 글과 언어를 통해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듯이, 이 세계는 여전히 진보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이 숨막히는 잿빛 세상이 근미래에는 잿빛을 거두고 밝은 세상이 되어 우리 곁으로 다시금 찾아올 것임을..



저자  손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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