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카풀 서비스에 앞서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들

새 날 2018. 12. 1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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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업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카카오가 결국 카풀 시범 서비스를 강행하면서 한 택시 기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발생했다.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번 사태는 비록 또렷하지는 않지만 어떤 상징적인 이미지 하나를 어슴푸레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보았음직한, 기술로 무장한 신 문명이 구닥다리의 것들을 몰아내면서 그 자리를 꿰차는 장면 따위의 것들 말이다. 때문에 한 사람의 안타까운 죽음은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갈등과 충돌 그리고 희생의 서막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처럼 다가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익에 매우 충실한 경향이 있다. 이렇듯 개인의 지극히 사사로운 이익은 때때로 이념이나 사상 따위를 훌쩍 뛰어 넘어 더욱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가장 비근한 사례로는 최근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페미 문제를 들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2,30대의 지지를 등에 업고 들어선 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문빠라 불리는 핵심 지지층의 다수는 이들이 차지한다. 하지만 근래 다수의 2,30대 남성들이 문재인 정부로부터 등을 돌렸다. 페미를 두둔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익 앞에서는 결코 약자를 약자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이기에 진영 따위는 애초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셈이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권리나 이익이 침해 당한다고 생각되면 소위 이념이나 사상 따위도 서슴없이 내차버리는 게 바로 그들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근래 크게 요동친 데엔 바로 이러한 연유가 한 몫 단단히 거든다. 이러한 경향성은 카풀 논란과 관련하여 특히 두드러진다. 카풀 서비스는 플랫폼을 기반으로 다수에 이르는 소비자를 생산자의 범주로 이끌어내면서 서비스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고 반면 가격을 낮추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많은 소비자들이 카풀 서비스 도입을 환영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소수의 그룹인 생산자에 해당하는 택시 업계는 어떨까? 낡은 차량과 비싼 가격, 그리고 불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들은 어느덧 소비자에게 있어 일종의 악의 축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그들 스스로가 변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측면이 크다. 어쨌거나 카풀 서비스의 도입은 이들로 하여금 일자리를 잃게 하거나 최악의 경우 생존권을 위협 받게 할지도 모르는 막다른 궁지로 내몰고 있는 셈이다.


오늘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하나는 바로 이러한 요즘 사람들의 성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카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카풀을 직접 이용해보니 그럴 법도 하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카풀로 이용한 차량은 벤츠였으며, 택시와는 달리 카카오에서 말하는 이른바 '크루'가 집 앞까지 매우 친절하게 안내해준 데다가 택시비보다 더 비용이 적게 들었으니 택시 기사들의 반발이 이해가 되더라는 내용이다. 해당 글에 달린 댓글들은 한결 같다. 자신도 이용해보고 싶다거나 카풀이 대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등 오로지 그들의 처지와 입장에서 작금의 이슈를 바라보며 주변에 대해서는 일절 헤아리려고 하지 않는 눈치였다.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에도 이에 대해서는 아예 눈곱만큼의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숨진 택시기사와 관련한 기사의 댓글은 더욱 가관이다. '숨진 건 안타깝다, 삼가 명복을 빈다' 라고 말하면서도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느냐, 카풀이 별거라고 목숨까지 바치느냐, 이런 방식이 최선이었느냐'는 등의 토가 달려 있다. 숨진 분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신들이 처하게 된 현실을 호소하고 분노를 표출하려 노력했으나 이를 바라보는 뭇사람들의 시선은 당사자의 입장에 따라 이렇듯 무관심인 듯 비아냥인 듯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목도했다면 거기에다 대고 토를 탈 게 아니라 왜 그를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는지, 그가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건 무엇이었는지, 현재 택시 기사들을 분노케 하는 건 무언지 먼저 돌아보았어야 함이 옳지 않을까? 비록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 해도 말이다. 한 사람의 생명마저도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이익 앞에서 이렇듯 비아냥과 놀림감이 되어버리게 하는 작금의 현실은 너무도 가슴이 미어지게 한다.


지금처럼 작은 이익 때문에 보다 소중한 것들을 놓치게 되는 경우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과연 무얼까? 통신과 기술의 발달 덕분에 앞으로 웬만한 서비스들은 죄다 플랫폼을 기반으로 이뤄질 공산이 크다. 카카오가 갖가지 생활밀착형 플랫폼 서비스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미래는 결국 플랫폼 기업이 이끌어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진즉에 간파한 덕분이다. 문제는 굴지의 플랫폼 기업을 향한 과도한 욕심 내지 조바심에 있다.


과거에는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재벌의 횡포로 약자들이 눈물을 흘렸다면, 앞으로는 4차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포장된, 플랫폼을 기반으로 무장한 기업들의 횡포로 약자들이 거리로 나앉게 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해질 공산이 커졌다. 카카오는 플랫폼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수수료를 꼬박꼬박 챙겨 배를 불리면서도,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우리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의 밥그릇을 빼앗고 있다. 그러면서도 달콤한 이익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의 지지를 지렛대 삼아, 아울러 4차산업혁명이라는 사회적 변화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산물이라며, 항변만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변명이 가당치 않음을 잘 안다. 왜냐하면 상생을 위한 노력이나 소통 따위가 일절 이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택시기사의 억울한 죽음은 바로 이로부터 기인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회에 변화가 이뤄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노릇이다. 어느 누구도 이를 막을 재간은 없다. 그러나 그 격차로 인한 충격은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카카오는 이를 외면했다. 카카오가 벌써부터 이 정도의 횡포를 부린다면, 웬만한 생활 플랫폼을 모두 장악, 소비자들이 생활 곳곳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이들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구축될 경우,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는지는 생각 만으로도 벌써부터 끔찍하다.


머리를 하러 갈 때에도, 택시를 탈 때에도, 음식 주문을 할 때에도, 카풀을 이용할 때에도, 기타 생활 곳곳에서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 움직이면서 돈을 꼬박꼬박 갖다 바치는, 자발적 노예가 될 공산이 크다. 편리함과 안락함 그리고 재미에 흠뻑 도취된 채 카카오톡의 '뿌리기' 기능을 이용하여 이곳저곳에 장난 삼아 돈을 마구 뿌리면서 깔깔 대고 있는 사이, 카카오의 칼날이 서서히 당신의 목을 겨눠 올 개연성이 아주 높다. 대형마트가 들어서자 깨끗함과 편리함이 너무 좋은 나머지 왜 휴일에 영업을 못하게 막는 것인지 투덜대는 사이, 주변에 있던 우리 이웃들이 모두 망해 대형마트의 임시직이 되어 청소를 하거나 캐셔 역할을 하게 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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