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기시감과 씁쓸함으로 다가오는 소설 '해리'

새 날 2018. 12. 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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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인터넷신문사 기자인 한이나는 어머니의 병 간호 때문에 고향인 무진에 내려오게 된다. 이곳에서 그녀는 어릴 적 아련한 기억을 소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데, 다름 아닌 과거 함께했던 인물들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다.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알고 지내온 동창 해리와 무진 성당 신부 백진우가 바로 그 인물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녀에게는 꺼림직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해리와는 특별히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나 한이나에게 저장돼 있던 그녀의 몸짓이나 행동으로부터는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부감 따위가 전해져 온다. 백진우는 보수 일색의 무진 교구에서 유일한 진보 색채를 띤 성직자로 평가 받고 있는 혁신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백진우가 한이나에게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치욕스러운 상흔을 남겼다. 성직자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한이나에게 범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해리와 백진우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읽히는 건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성당 앞에서 백 신부를 성토하는 인물을 통해 전해 듣게 된 이들 두 사람의 관계로부터는 특별한 정황이 포착된다. 기자라는 직업적 직감에 따르면 장애인 지원 단체를 운영하는 해리와 신부 백진우 사이에는 성직자와 신자 관계 이상의 특별한 무엇이 있음이 감지된다. 알면 알수록 기가 막힌 현실과 직면해야 했던 한이나는 이참에 직장에는 아예 휴직계를 내고 현재 무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의 뒤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기로 작정한다.



그녀가 동원 가능한 인맥을 모두 활용하고 지인들의 도움을 통해 해리와 백진우의 뒤를 캐보니 그동안 이들이 저질러온 행위는 개인적 일탈과 욕망을 넘어 어느덧 거대한 사회악으로 돌변해 있었다. 지역내 유력 정치인과 관료들을 갖은 권모술수를 활용해 자기 편으로 만든 뒤, 장애인의 재활을 돕겠다며 모금활동을 벌여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일에 활용하였고, 기부금을 빼돌려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해야 할 종교단체는 내부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바꾸려 하기보다 그저 덮고 감추는 데에만 급급하다. 더욱 어이 없었던 건 해리와 백진우가 진보라는 이념의 탈을 쓴 채 진영 논리를 전면에 내세워 몹쓸 짓을 지속해 왔다는 사실이다. 일개인의 욕망이라고 하기에는 거대 세력으로 뿌리내려진 그들 앞에서 개개인의 선의는 단순히 먹잇감으로 둔갑하기 일쑤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놀랍다기보다는 충분히 그럴 법한 개연성이 존재하며, 실제로는 책속의 내용보다 훨씬 더 악한 무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5년 동안이나 직접 취재에 나서는 등 꽤나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안다. 그만큼 이 책의 내용은 픽션이라기보다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일종의 보고서에 가깝다.


그래서 놀랍다기보다 기시감이 먼저 다가온다. 책속에서 언급된 소망원 사건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부산 형제복지원이나 대구 희망원 사건 등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한이나와 해리를 향하던 백진우 신부의 파렴치한 짓은 그동안 숱한 목회자들이 종교라는 가면을 쓴 채 범해온 바로 그 몹쓸 행위에 가깝다.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앞세워 이를 돈벌이로 삼고 개인의 부를 축적하거나 인권 유린을 저지르는 행위는 비일비재하다. 때문에 두 권의 책을 단숨에 읽으면서 놀랍다기보다는 그저 우리 사회의 치부 한 곳을 들춰낸 느낌만이 온몸을 지배해올 뿐이다.


밤하늘을 장식하는 무수히 많은 십자가의 숫자만큼이나 우리 사회에서 종교인들의 일탈이 잦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겠노라며 나선 이들이 되레 그들을 인권의 사각지대로 내몬 채 기부금과 성금 등을 착복하여 배를 불리는 사건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어느 시설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인권 탄압 행위가 빈번하게 벌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짓을 일삼는 치들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한다는 일부 종교인들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직접 한이나가 되어 취재에 나서는 등 무진장 애 썼을 생각을 하면 애처롭고 안쓰럽지만, 우리가 몸소 살아가며 직접 겪고 있는 이 사회가 사실은 픽션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은 곳인 데다가 되레 더욱 심각한 현실로 다가오는 까닭에 오히려 이 작품의 가치를 반감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한편 작품 속에서 한이나와 함께 등장하는 변호사 강철이 그녀와 로맨스를 펼치는 내용은 다소 뜬금없다. 작품의 완성도를 반감시키는 아쉬운 대목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지점은 바로 인물들에 대한 설정 부분이다. 한이나는 유명한 화백의 딸로서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난 일종의 금수저에 가깝다. 반면 이 소설에서 악의 축으로 등장하는 해리나 백진우의 경우 가정 환경이 모두 좋지 못하다. 시쳇말로 흙수저에 가깝다. 흙수저들이 결국 자신들의 처지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회악으로 돌변한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전형적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 역시 바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터라 상상력의 총아라 일컬어지는 픽션에서조차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몹시도 씁쓸하게 다가온다.



저자  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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